그린베이 패커스의 우승으로 막을 내린 제45회 수퍼보울이 또 하나의 대형스타를 탄생시켰다.

주인공은 패커스를 진두지휘한 쿼터백 애런 로저스다. 로저스는 만 27세의 젊은 선수이기 때문에 앞길이 구만리 같은 선수다.

로저스는 수퍼보울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되고 난 뒤 인터뷰에서 밝혔듯 1990년대 북미미식축구(NFL)계를 호령했던 조 몬타나와 스티브 영을 보고 자란 세대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토박이인데 버티카운티 시코에서 출생, 이후 명문인 버클리 대학교에 입학해 대학풋볼 유명쿼터백으로 맹위를 떨쳤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난 건 로저스가 원래부터 오로지 풋볼선수를 꿈꿨던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 그는 물론 풋볼도 잘했지만 야구에 대한 동경이 강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야구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고향을 떠나 멀리 오리건주 비버튼에 위치한 중학교에 들어갔다.

거기서 로저스는 야구를 했고 주 포지션은 유격수였다. 때로는 중견수와 투수를 맡는 등 야구선수로의 재능을 활짝 피웠다.

그러나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고 그는 결국 마음의 고향인 풋볼로 되돌아온다. 1997년 고향 시코의 고등학교에 입학, 야구의 대한 미련을 완전히 접고 프로풋볼선수가 되기 위한 본격수업에 돌입했다.

로저스는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고등학교에서 2년간 주전 쿼터백을 맡으며 쭉쭉 성장했고 명문대학에 진학해서는 자신이 몸담은 캘리포니아 골든 베어스(버클리)의 여러 기록을 몇 차례나 갈아치우는 등 맹활약했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점은 좀처럼 실수가 없는 안정적인 플레이였다. 일례로 패스시 가로채기를 당하는 비율이 불과 1.43%로 역대최저를 마크할 만큼 패스의 정확성이 두드러졌다.

이런 현상은 프로에 들어와서도 고스란히 이어져 로저스하면 실수 없는 정확한 패스의 소유자로 정평이 나 있다.

대학 때 워낙 잘해 벌써 프로 스카우트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2005년 NFL 드래프트 1라운드 24번으로 그린베이 유니폼을 입었다. 전체 1번 지명자로 꾸준히 거론돼왔으나 정작 드래프트에서 24순위까지 미끄러진 스토리는 당시 풋볼계에 숱한 화젯거리를 낳았다.

그린베이는 뜻하지 않은 행운을 잡았다. 오랫동안 팀을 이끌던 명쿼터백 브랫 파브의 후계자를 찾던 터에 로저스가 눈에 쏙 들어왔고 그걸 놓칠 리 없었다. 서둘러 로저스와 5년 770만달러(보장금액 540만달러)의 조건에 도장을 찍었다.

파브는 로저스가 들어오고 난 3년 뒤 팀을 떠났다. 3년간 로저스는 역대 최고의 쿼터백 파브의 플레이를 바로 옆에서 유심히 지켜보며 꿈을 키웠다. 첫 3년간은 파브의 백업역할에 지나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의 기다림이 지금의 로저스를 있게 한 터닝포인트였다.

파브라는 거대한 벽에 막혀 세간의 관심에서 서서히 잊혀져가던 로저스는 파브가 팀을 떠난 2008시즌 팀의 주전 쿼터백을 맡으며 두각을 나타냈다.

주전 첫해부터 최정상급 쿼터백의 기록을 냈다. 대학시절의 패싱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역시 그는 패스가 강점인 쿼터백이었다.

지난 수퍼보울에서도 보여줬듯 무엇보다 실수가 거의 없는 완벽한 패스가 일품이다. 그의 손끝을 떠난 공은 어김없이 터치다운으로 연결됐다.

그 강력하던 피츠버그 스틸러스 수비진이 로저스의 날카로운 패스에 허둥지둥 대다 터치다운을 계속 허용, 결국 무릎을 꿇었다.

스틸러스 뿐만 아니라 플레이오프(PO) 내내 내셔널풋볼컨퍼런스(NFC)의 강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나가떨어졌다. 애틀랜타 팰컨스, 시카고 베어스, 필라델피아 이글스 등 강팀들이 홈 어드밴티지를 살리지 못했다. 로저스를 앞세운 그린베이에 사상 첫 '와일드카드(WC) 수퍼보울 우승'이라는 진기록을 헌납했다.

대학최고의 별이 프로데뷔 후 첫 3년을 무명이나 다름없이 고생했다. 그러고는 혜성처럼 나타나 불과 3년 만에 최정상의 고지를 단숨에 점령했다.

로저스의 전성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점에서 더욱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