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 남자들이 단연 화제다. '애들'만 나오던 TV 프로그램에 이들이 출연해 이야기와 노래를 들려줬다. 중·장년은 물론이요 10대들까지 "정말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1960년대 말 서울 무교동에 있었던 음악감상실 '세시봉(C'est Si Bon)'에서 활동했던 송창식(63) 윤형주(63) 김세환(62) 세 명이다. 이들의 데뷔를 '세시봉'의 MC로 지켜봤던 이상벽(63)까지 네 명의 '세시봉 친구들'을 지난 19일 밤 광화문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이들은 12월 21·22일 그랜드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디너쇼를 연다. '포크 빅3'로 불리는 세 명은 줄곧 함께 공연해왔으나 이상벽의 참여는 처음이다.
'한국 MC 1호' 이상벽이 이야기를 이끌어갔다. "내가 이 친구들뿐 아니라 조영남과 한대수 데뷔 무대도 모두 봤어요. 조영남은 맑은 날인데도 우비에 장화를 신었고, 한대수는 머리를 무릎까지 기르고 맨발로 왔더라니까. 분명히 고아일 거라고 짐작했죠."
당시 홍익대 미대생이었던 이상벽은 67년 봄 세시봉 '대학생의 밤' 사회자로 발탁됐다. 그때 그가 '삼행시 짓기'란 놀이를 만들었다.
"'두꺼비' 만화가 안의섭씨가 초대됐을 때 관객들에게 '두꺼비'로 삼행시를 지어보라고 했죠. 삼행시 인기 덕분에 저는 CBS '명랑백일장' MC로 옮겼어요." 우스개 '참새 시리즈' 역시 세시봉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이상벽의 친구였던 송창식은 그해 9월 세시봉 무대에 데뷔했다. 그는 통기타 반주에 오페라 아리아 '남 몰래 흘리는 눈물'을 불렀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나" 하며 혀를 내두르던 관객 속에 연세대 의대생 윤형주가 있었다.
2주 후에 무대에 오른 윤형주는 팝송 '로스트 러브(Lost Love)'를 불러 또 한 번 객석을 뒤집어놓았다. 이후 윤형주와 송창식은 '트윈 폴리오'로 뭉치게 된다.
"처음엔 싫다고 했어요. 이장희와 함께 '라이너스 트리오'로 활동하면서 문제가 많았죠"(윤형주) '민박집 빳다 사건'이 대표적이다. 윤형주와 이장희가 동해안에 놀러 갔을 때 이장희가 여학생 4명을 꼬였다. 민박집까지 데려가 놀던 중 여학생들의 일행인 남학생들이 각목을 들고 들이닥쳤다. 두 사람은 민박집 앞마당에 '엎드려 뻗쳐'를 한 채 엉덩이를 맞았다.
김세환은 세시봉 관객으로 이들을 만났고 훗날 생맥주집 '오비스캐빈'에서 이들과 함께 활동했다. 윤형주가 "세환이는 놀러 가서 여학생들한테 쪽지 심부름하던 사람"이라고 했다. 김세환이 사람 좋게 웃으며 받았다. "그 여학생들 앞에서 형주 형이 만든 노래가 '조개 껍질 묶어'예요. 그런 노래가 많죠. 윤여정(배우)씨 생일날 모여 놀 때 창식이 형이 만든 게 '창밖에는 비 오고요'죠. 제 노래 '길가에 앉아서(윤형주)', '사랑하는 마음보다(송창식)'도 그렇게 만든 곡입니다."
세시봉에는 '성점(星點) 감상실'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별점으로 노래를 평가하는 무대였다. 신인은 물론, 유명 가수들조차 이 무대에서 5점 만점인 '성점'으로 평가를 받았다. 패티김·윤복희·최희준 등이 모두 이 무대에 섰다.
세시봉은 술을 팔지 않는 음악감상실이었다. 팝 음악에 대한 청년들의 갈망이 이곳에서 분출됐다. 뮤지션뿐 아니라 각계 인사들이 그득했다. 수필가 피천득의 아들 피세영이 DJ였고, 소설가 최인호와 시인 김지하도 단골이었다. 서양화가 정강자는 전라의 몸에 물감을 칠하는 전위예술을 선보였다.
세시봉은 70년대 초 문을 닫았다. 국내에서 생맥주가 생산되면서 대학생들이 대거 생맥주집으로 옮겨간 탓도 있지만, 팝 음반이 본격 유입되면서 음악감상실의 입지가 좁아졌다. 송창식은 "자연스럽게 청년문화가 '생맥주와 청바지 시대'로 이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세시봉 친구들'은 자정이 돼서야 일어났다. 불모(不毛)의 한국 대중음악에 묘목을 심어 첫 결실을 거뒀던 장인(匠人)들이 어깨를 걸고 광화문 밤길로 사라졌다. 공연문의 (02)517-0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