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요하네스 얀 베르메르의 유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 그림은 네덜란드 헤이그의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그런데… 과연 그 미술관과 어깨를 마주한 건물과 그 앞 광장이 우리 민족에게 그야말로 피눈물 어린 통한(痛恨)의 장소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인은 얼마나 될까?
그곳은 관광지 '비넨호프' 안에 있는 현 네덜란드 상원의사당 '기사의 집(Ridderzaal)'이다. 숱한 국내 여행 가이드북과 블로그들은 이 위풍당당한 13세기 건물 사진을 올려놓으면서, 바로 그곳이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장소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다.
1907년 7월 4일, 세 명의 한국인이 이 건물 굳게 닫힌 정문 앞 광장 바닥돌 위에 주저앉아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전 평리원 검사 이준(48),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37), 그리고 주러시아공사 참서관 이위종(20)이었다.
그들은 고종 황제가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극비리에 만국평화회의장으로 파견한 세 특사였다. 6월 25일, 회의 개막 열흘 뒤에 헤이그역에 도착한 그들은 곧바로 국제 미아가 돼 버렸다.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만국평화회의 회원국 모두가 등을 돌렸다.
원래 대한제국은 만국평화회의 47개 초청국 중 12번째로 명단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의 을사늑약으로 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이미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영국은 제2차 영일동맹으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묵인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믿었던 러시아조차 한국을 배신했다. 세 특사는 헤이그에 오기 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황제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외무대신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가 친일 노선으로 외교정책을 바꾼 결과였다.
그것은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았던 대한제국으로선 최후의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열강의 체스 게임에서 최약소국 한국은 이미 버려진 말이었다. '회의장에서 쫓겨났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세 특사는 회의장 문 안으로 입장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세계 언론에 호소했다. 7개 국어에 능통했던 젊은 이위종은 이렇게 절규했다. "일본은 우리를 식민 상태로 몰아넣고 독립을 존중한다고 한다. …당신들(서구 열강)이 말하는 법의 신(神)이란 유령일 뿐이고, 정의를 존중한다는 것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으며, 종교조차 한낱 위선에 불과하다."
이제 세 사람은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운명이었다. 제삼자에게서 전달받은 고종의 신임장은 알고 보니 위조된 것이었고, 황제가 하사했다는 활동자금 20만원(쌀 8만 가마 값)은 받은 적도 없었다(배달사고 추정). 그들은 만리타국에서 철저히 버려졌다. 그중 이준의 상태가 심각했다. 4개월 전 법부대신 탄핵 사건으로 70대의 태형을 받은 데다 1만㎞가 넘는 여행 끝에 실의와 분노로 건강을 잃은 그는 며칠 동안 곡기마저 끊은 상태였다. 낙일(落日)이 숙소 서쪽 창가에 가득했을 7월 14일 저녁, 이준은 "내 조국을 도와주소서"란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숨졌다.
지금 이준열사기념관이 된 드 용 호텔은 당시 여인숙 수준의 초라한 숙소였다. 3년 전 이곳을 취재한 뒤 우울한 기분으로 호텔로 돌아와 TV를 켜니 뉴스에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등장했다. 100년 전 만국평화회의 입장조차 거부당했던 한국이, 이제 그 만국평화회의의 후신 격인 유엔의 사무총장을 배출한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는 지난주 G20 정상회의까지 개최했다. 네덜란드는 G20에 초청해 달라고 한국측에 치열한 로비를 벌였다는 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