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따 멀기도 멀다. 지도에선 가까웠는데 왜 이리 멀다냐."

4시간 넘는 버스 여행이 지루했는지 5학년 보걸(10)군이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투덜거렸다. 그러자 친구 기창(11)군이 "조금만 가면 우리 외갓집이야"라며 참으라고 했다. 지난달 12일 오후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출발해 남동쪽으로 5시간을 달린 버스가 인구 10만8000여명의 소도시 산호세(San Jose)에 도착해 산호세 초등학교에 들어섰다. 버스 문이 열리자 전남 화순군 도암면 천태초등학교 4~6학년 학생 25명이 내렸다. 필리핀 엄마를 둔 친구 기창군의 외갓집에 수학여행 간 초등학생들이다.

지난달 13일 오전 필리핀 소도시 산호세(San Jose)의 산호세 초등학교에서 전남 천태초등학교 어린이들과 필리핀 아이들이 함께 게임을 즐기고 있다. 다문화가정 자녀가 30%인 천태초등학교 학생 25명은 다문화 체험학습을 위해 한 학생의 어머니 고향인 필리핀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천태초교는 전체 학생 수가 43명인 미니 학교다. 전교생의 30%가 필리핀·일본·몽골 출신 엄마를 둔 다문화가정 아이들이다. 이번 수학여행은 사회적 기업 ㈜트래블러스맵이 도왔다. 이 회사 변형석(39) 대표는 "기창이는 외갓집에서 엄마의 고향생활을 체험하고, 그 친구들은 홈스테이를 통해 말로만 듣던 친구 외갓집의 필리핀 문화를 체험하게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수학여행비는 ㈜메가스터디 손주은(49) 대표가 후원자를 찾던 ㈜트래블러스맵에 연락해 마련해 줬다. 손 대표는 외부 강연료를 별도로 모아둔 2500만원짜리 개인통장을 아이들을 위해 기부했다.

버스에서 내린 아이들은 다시 길쭉한 지프 모양의 지프니(Jeepney)라는 필리핀 대중교통 차량에 올라타 10여분 뒤 쿨라이레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기창군의 엄마 미리로우타 갈라유고(31)씨 친정집이 있는 곳이다. 갈라유고씨는 2002년엔 3살 된 기창군을 안고 혼자 고향집에 갔었지만 8년 만인 이번엔 기인(7·천태초1)과 기웅(4·천태초 병설유치원) 두 아들을 더 데리고 친정을 찾았다. 결혼식 이후 처음으로 장인·장모를 뵌 남편 홍권희(48)씨는 "너무 오랜만에 뵈니 어색하고 죄송하네요"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기창군은 "어릴 때 온 기억이 잘 안 나서 처음 온 것 같다"며 "친구들이랑 오니까 더 좋다"고 기뻐했다. 아이들은 필리핀 음식을 해 주던 친구 엄마의 아빠·엄마이자 기창이의 외할아버지·외할머니를 보자 연습해뒀던 인사말을 크게 외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코모 에스타(안녕하세요라는 뜻의 스페인어)!"

아이들은 산호세에서 2박3일 동안 2명씩 조를 이뤄 산호세 초등학교 교사들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다. 6학년 정화(12)양과 4학년 선미(10)양은 세니타 부스타만테(50·여) 교사 집에서 저녁 식사로 쌀밥, 돼지고기, 다진 토마토, 채소인 카모티탑스를 먹었다. 선미양은 "카모티탑스는 선생님이랑 시장에 가서 산 거예요"라며 "맛있었다"고 자랑했다. 망고를 처음 먹어보는 정화양은 휴대전화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누르며 '인증샷'(현장 증명 사진을 뜻하는 인터넷 은어)을 찍었다.

천태초등학교 아이들은 현지 학생들과 함께 필리핀 문화를 체험했다. 반 토막 낸 코코넛 껍질을 엎어놓고 발로 밟고 걸어 다니는 '까당까당', 쌀 포대에 두 발을 넣고 빨리 달리는 '사코' 같은 필리핀 놀이를 즐겼다. 필리핀 재래시장도 돌아봤다. 천태초등학교 아이들은 줄넘기 댄스와 사물놀이를 펼쳐보이며 필리핀 학생들에게 한국문화를 선보였다.

즐거운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카레향 비슷한 필리핀 음식 특유의 향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고 섭씨 35도나 되는 무더위를 견뎌야 했다. 방안에 수시로 출몰하는 각종 벌레와 도마뱀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6학년 성준(12)군은 "집 떠나면 고생인 것 같다"고 했고, 4학년 동준(10)군은 "허벌나게 덥다잉"이라며 땀을 흘렸다. 6학년 남호(12)는 "잘 때 모기한테 20방이나 물렸어요. 필리핀 모기는 특수훈련을 받았는지 윙윙 소리가 안 나요"라고 웃어 보였다.

천태초등학교 정귀채(60) 교장은 "아이들에게 서로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