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오후 2시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 동대문역사관 앞. 등산복과 모자, 선글라스를 갖춘 시민 30여명이 동대문 주변의 서울성곽길을 탐방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청계천문화관이 마련한 '동대문 주변 서울성곽 둘러보기' 프로그램으로, 동대문 주변 골목길과 낙산 등지를 2시간 정도 걸으며 조상의 숨결을 느껴보는 걷기 행사다.
이날 탐방은 박경룡(70) 서울시민대학 교수(서울역사문화포럼 회장)의 안내로 이루어졌다. 조선 초에 세워졌다가 지난 2008년 동대문운동장을 헐어내면서 발굴·복원된 이간수문(二間水門)을 비롯, 광희문(光熙門)과 장충동 성곽길을 걸어 동국대 숭정전(崇政殿)에 이르는 코스였다.
◆역사 숨결 느끼는 동대문 주변 성곽길 걷기
"시체가 드나든다고 해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린 곳이에요."
상여에 실린 서울시민의 운구가 통과했다는 광희문으로 들어서자 탐방객들의 눈길이 쏠렸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인근 도로 한가운데 있어 평소에는 구경하지 못했던 광희문 천장을 신기한 듯 올려다보기도 하고 벽면을 살짝 두드려보기도 했다. "여기가 저승문이라고? 무시무시하네."
광희문의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자 성벽 안쪽에 정으로 쪼아 새긴 문구가 보였다. 안내를 맡은 박 교수가 돌에 새겨진 한자를 읽어주었다. '監官 金壽涵(감관 김수함)/軍 金英得(군 김영득)/石手 金成福(석수 김성복)/辛未年八月日(신미년8월일)'
"이 문구는 숙종 17년인 신미년(1691년)에 성곽을 개축하면서 새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금융실명제 하듯이 서울 성곽도 '건설 실명제'를 했어요. 자기가 맡은 부분이 부실공사로 무너지거나 허술하면 처벌을 받았죠."
서울 성곽은 총 97개 구역으로 나눠서 구간(600자=180여m)마다 공사 및 감독 책임자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탐방객들은 정으로 하나하나 쪼아 새긴 조상의 이름을 만져보기도 했다.
광희문에서 장충동 방향으로 가는 횡단보도를 건너 장충체육관 쪽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에는 오솔길이 하나 나 있다. 긴 성곽길을 따라 나무를 심고 단장한 길로, TV드라마 '겨울연가'에서 주인공들의 데이트 코스로 등장하기도 했다. 울퉁불퉁한 자연석 계단을 따라 오르자 까마득한 성벽 능선이 하늘을 가렸다. 유심히 살펴보니 성곽의 아랫돌과 윗돌 모양이 달랐다.
"태조 5년(1396)에는 비교적 작은 석재를 이용해 돌을 쌓았고 세종 4년(1422)에는 모가 둥글게 된 넓적하고 평평한 돌로 개축했어요. 숙종 30년인 1704년부터는 정방형으로 다듬은 석재로 벽돌 쌓듯이 빈틈없이 축조했죠." 박 교수는 "서울성곽에는 오랜 세월 동안 도성을 쌓은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고 말했다.
장충동에서 한남동 버티고개까지 이르는 성곽길 구간은 들꽃이 피고 새소리가 들려 마치 교외로 나온 느낌이었다. 돌 벤치에 앉아 땀을 씻어내던 송진관(63·경기 의정부시)씨는 "평소 성곽 지도를 들고 숭례문에서 안중근 동상까지, 백범광장에서 남산타워까지 이르는 길 등을 걷는다"며 "도심 성곽길을 따라 걸으면 고색창연한 흔적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체험학습 전문강사 박수현(여·32)씨는 "코스의 길이나 난이도가 무난해 아이들도 쉽게 걸을 수 있겠다"고 했다.
수표교가 있는 장충단공원을 지나 옛 경희궁 정전인 동국대 숭정전에서 탐방은 마무리됐다. 김영숙(여·58)씨는 "평소에 휘휘 지나쳤던 골목길을 자세한 설명과 함께 들으니 숨겨진 역사들이 보물처럼 튀어나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김정신(여·75)씨는 "서울에서 몇십년을 살아도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 전쟁과 일본 강점기 상처로 많이 훼손됐지만 성곽길이 복원된다고 하니 바람직한 것 같다"고 말했다.
청계천문화관이 오는 7월 1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2시에 진행하는 '동대문 주변 서울 성곽 둘러보기' 프로그램은 A·B 두 개 코스로 나눠 약 2.5km 구간에서 열린다. A코스는 이간수문-〉오간수다리-〉가산터-〉흥인지문-〉낙산-〉낙산공원-〉삼군부 총무당-〉혜화문이며, B코스(광희문 코스)는 이간수문-〉광희문-〉장충동 성곽길-〉수표교-〉장충단 구간이다. 서울역사박물관(www.museum.seoul.kr)이나 청계천문화관 홈페이지(www.cgcm.go.kr)에서 참가 신청을 하면 선착순 30명을 선발한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즐기는 역사·문화 프로그램
동대문운동장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는 서울성곽과 이간수문, 하도감터 등 서울의 살아있는 역사를 만날 수 있으며, 각종 문화프로그램도 즐길 수 있다.
동대문역사관에서는 운동장 부지에서 발굴된 조선 및 일본 강점기의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야외에는 조선시대 건축물 유구(遺構:과거 건축물의 자취)를 선보이고 있다. 매주 금요일 오후 2~4시 서울성곽에 관한 역사 강의도 마련되어 있다.
동대문운동장기념관에서는 동대문운동장 모형 및 운동장 시설 변천사, 스포츠 유물·단체 휘장 등 기념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동대문시장의 향수를 느끼고 싶다면 서울디자인갤러리에 열리는 '동대문 낭만시장전(展)'을 찾아보자. 오는 9일까지 동대문 시장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동물을 주제로 한 전시가 열리고, 12~30일에는 시장 내 특색있는 가게 모습을 보여준다.
공원 내 야외무대에서는 오는 7월 18일까지 화~일요일 오후 2시 사물놀이와 브레이크 댄스 등 동서양 문화가 어우러진 공연이 펼쳐진다. 매주 토·일요일 오후 3시30분에는 연극·음악·국악·무용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사랑의 문화나눔' 공연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