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의 눈에 비친 게이 이야기가 필요했다. 게이 하면 바로 핑크색 쫄바지를 떠올리는 무지한 이성애자의 눈으로 재단한 동성애자 이야기는 미덥지 않아서다. < 행복한 마이너>의 저자로 일찌감치 커밍아웃한 '용자' 황의건 이사(홍보대행사 '오피스h' CEO)가 < 인생은 아름다워> < 개인의 취향>과 게이 패션에 대해 예리한 비평과 함께 진솔한 속내를 하이컷(www.highcut.co.kr)에 털어놨다.
< 편집자 주>
< GAY STORY>
수천 년 동안 금기시됐던 게이 코드는 막장 드라마에서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소재다. 최근 드라마 소재의 빈곤 속에 급부상하고 있는 게이 이야기는 자극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콘텐츠로 강렬한 임팩트를 제공하고 있다. 상업성이 됐든, 진정성이 됐든, 이제 대중매체의 동성애 기피는 옛말이다.
< 커피 프린스> 세련된 게이 코드
< 커피 프린스>는 동성애 코드를 가장 세련되고 아름답게 표현한 한국 드라마다. 남장 여자로 분한 윤은혜의 절묘한 중성미는 어처구니없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했다. 윤은혜표 헤어스타일과 특유의 아우라에 힘입은 바 크다. 고은찬(윤은혜)을 사랑하게 된 최한결(공유)은 전형적인 대한민국 메트로섹슈얼의 표본이다. 이기적인 기럭지, 커피를 이해하는 마니아적 성향, 모든 걸 가진 듯한 엄친아, 아픔 있는 과거로 여성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캐릭터 등... 그는 극중에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하면서 혼란에 휩싸이지만 이내 사랑의 본질은 성별이 아닌 인간에 있다는 진리를 깨달으며 용기있게 자신의 사랑에 대처한다. 많은 여성 시청자들이 최한결에게 열광하는 부분이다. 비겁하게 슬쩍 간만 보는 '간장남'들의 우유부단함에 질린 여성들이 그의 조건 없는 사랑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는 셈.
이 드라마의 유산은 '진정한 사랑은 성별을 초월한다'라는 메시지와 더불어 보너스로 따라오는 공유-이선균이라는 멋진 남성상이다. 공유의 상반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타이트한 피케 셔츠는 남성들 사이에 패션 따라잡기 신드롬을 일으켰으며, 이선균의 멋진 목소리와 지적인 뿔테 안경 역시 클래식 무드를 타고 그의 존재감을 세상에 확실히 알렸다. 하지만 여장 남자라는 장치만 존재했을 뿐, 완전한 남자와 남자의 사랑을 다루지 못한 부분은 아쉽다.
< 인생은 아름다워> 섬세한 게이 코드
최근 안방극장에 찾아온 동성애 이야기는 좀 더 파격적이고 적극적이다. SBS 주말드라마 < 인생은 아름다워>와 MBC 수목드라마 < 개인의 취향>이 그것이다. < 인생은 아름다워>는 진짜 게이를 가족의 일원으로 진지하게, < 개인의 취향>은 여자의 입장에서 오해한 가짜 게이를 코믹하게 다루고 있다. < 인생은 아름다워>는 대가족의 장손으로서 가족들 앞에 당당하게 나서지 못하는 태섭(송창의)과 경수(이상우), 두 남자의 사랑을 다른 가족 구성원의 에피소드와 동등하게, n분의 1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동성애자들이 겪는 가장 큰 난관인 '커밍아웃'이라는 민감한 이슈에까지 바짝 다가선 < 인생은 아름다워>는 과장되지 않게 동성애 소재를 풀어간다. 이성애자 가족들과 어우러진 현실적인 이야기 구도가 리얼리티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안방극장의 한계 탓에 스킨십이나 애정 표현이 100% 보여지진 못하지만 대한민국 톱 클래스 남자 연기자들의 섬세한 게이 눈빛 연기는 한국 드라마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게이 커뮤니티에서는 이미 두 배우의 연기가 최대 핫 이슈다. 극중 의사인 태섭은 게이라는 성 정체성을 패션보다는 다소 폐쇄적인 성격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가끔 상대역 경수를 향해 뜬금없는 애교를 묘한 하이 톤으로 깜찍하게 날림으로써 자신이 게이임을 시청자들에게 간간이 확인시켜줄 뿐이다. 반면 마초 같고 단순해 보이는 경수는 사진작가라는 직업을 의식한 듯 파격적이고 보헤미안적인 스타일을 선보인다. 블랙 트렌치코트나 워커, 컬러풀한 카디건과 스카프 등 강렬한 코디네이션으로 게이성을 스타일로 표현한다.
하지만 게이라는 극중 설정을 의식하지 않고 이 두 남자의 스타일만을 놓고 본다면 도무지 이들이 게이임을 알아채기 어렵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실제로 게이 중엔 이성애자보다 더욱 이성애자처럼 행동하고 살아가려고 하는 일명 '스트레이트 액팅 게이(straight acting gay)'가 매우 많다. 원래부터 그런 경우도 있지만 자신의 성 정체성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 스스로 훈련하고 폐쇄적으로 자신을 가둬 이성애자처럼 행동하는 게이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 이런 부류의 게이들은 눈에 띄지 않게 많은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데 그중 하나가 여자와의 결혼이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고자 여자와 위장 결혼하는 경우가 대부분. 많은 여성들이 이런 부류의 게이들로 인해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게 되며 많은 경우 파국을 맞는다. 이런저런 이유에서 게이는 숨은그림찾기처럼 어려운 퍼즐 같은 존재이자, 이성애자들이 생각하듯 획일화되고 정형화된 아이콘으로 정의할 수 없는 존재다.
< 개인의 취향> 폭력적인 게이 코드
< 개인의 취향>은 다소 가볍고 자주 코믹하다. 게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소 과장되며 < 웃찾사>의 초코보이('핫, 핫, 댓츠 베리 핫'을 외치던 두 스트레이트 개그맨. 게이의 과장된 행동을 코미디 소재 삼았던 이들은 게이가 아님을 방송을 통해 커밍아웃한 바 있다)를 연상시킬 정도로 상준(정성화)의 연기는 코미디스럽다. 극의 재미를 주기 위함이지만 덩치 큰 가짜 게이가 '언니, 언니~' 외치는 모습은 웃기면서도 혐오스럽다. 게이가 열등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라 씁쓸했다. 다르다는 것은 무지한 이들에겐 충격이거나 웃긴 일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새로운 문화가 될 수 있는 열린 가능성 아니겠는가. 게이인 척하는 일반 남성이 연기하는 게이의 여성성이란 다분히 게이에 대한 혐오감이나 비하의 시각이 담겨 있는 매우 시대착오적인 연출이다(제작진의 '호모포비아(게이 공포증)'가 작용한 것일까).
뿐만 아니라 < 개인의 취향>이 게이를 마주하는 시선은 다소 폭력적이다. 걸핏하면 "이 사람 게이다"라고 외치는 개인(손예진)의 모습은 게이 세계에서 가장 혐오하는 '아우팅(Outing)'의 전형이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는 커밍아웃과 달리 다른 사람에 의해 자신의 성 정체성이 폭로되는 것이다. 게이라는 민감한 소재를 다루면서 사려 깊지 못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게이를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일부러 배려 없는 캐릭터를 의도한 것이 아닌 다음에야 아우팅을 남발하는 설정은 폭력이다.
최근 들어 게이라는 소재를 안방에서 논하게 됐을 만큼 동성애 코드는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이 됐다. < 섹스 앤 더 시티>나 < 퀴어 애즈 포크> 같은 미국 드라마를 보고 자란 20대 초반의 여성 시청자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퀴어 문화는 한 단계 성숙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 여성들과 많은 교감을 나누고 있는 한국의 20~30대 남성들에게도 서서히 시각의 변화와 희망이 엿보이기 시작한다. 뉴욕에선 남성이 여성으로부터 "당신 게이인가요?"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당신 세련됐군요"라는 칭찬인 동시에 이성적인 관심을 뜻하는 우회적 표현으로 통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남자들이 당황하거나 불쾌해하지 않고 "아닌데요, 전 이성애자입니다. 제게 관심 있으신가요?"라며 여유 있게 받아칠 날이 머지않았는지도 모르겠다.
* 황의건 이사는 홍보대행사 '오피스h'의 CEO로 VOGUE, ELLE, BAZAAR, GQ, ARENA 등 패션지에 컬럼 기고, 까사 스쿨, KAIST 등에서의 강의, Onstyle, Olive TV 등 방송 프로그램 진행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