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시리즈 기사를 읽다 보면 일제 통감부도 나오고 총독부도 나오는데 두 기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통감과 총독의 역할은 같은데 호칭만 다른 것인가요, 아니면 수행했던 역할도 다른 것인가요? / 부산 연제구 독자 우진우씨
A: 을사늑약 근거로 외교 업무 맡는다며 1906년 통감부 설치해 내정간섭… 1910년 강제병합 뒤 식민지 최고통지기구인 총독부로 변신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이른바 '보호국(保護國)'으로 삼은 을사늑약을 강제한 때가 1905년 11월 17일이었습니다. 일제는 모두 5개조로 구성된 을사늑약 제3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넣었습니다.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제 폐하의 궐하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둔다. 통감은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京城)에 주재하고, 친히 한국 황제 폐하를 내알(內謁)하는 권리를 갖는다.'
일제는 이 조항을 근거로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 2월 통감부를 설치했습니다. 초대 통감에는 훗날 안중근 의사의 심판을 받는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했습니다. 이토는 3월 9일 통감으로 부임한 직후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시정개선 대상으로 금융·교육·군사제도·궁중·재정 문제 등 다섯 가지를 제시합니다. 모두 외교와는 무관한 국내 문제였기 때문에 고종은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이토는 "통감의 임무가 귀국에 대한 지도경영을 담당한다는데 강대국 정부가 모두 동의했다"며 외교뿐 아니라 내정도 자신의 뜻대로 처리할 것을 밝혔습니다.
을사늑약에도 통감의 역할이 적혀 있습니다. 일본국 정부는 한국의 각 개항장과 기타 필요로 하는 지역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체의 사무를 총괄하는 이사관(理事官)을 배치할 수 있고, 이들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통감은 사실상 일제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사무를 총괄할 수 있음을 슬쩍 집어넣은 것입니다.
초대통감 이토는 통감부의 역할을 계속 확대해 나갑니다.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퇴위시킨 직후인 1907년 7월에는 이른바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하고 법제정·행정처분·관리임명 등에서 통감의 허락을 받도록 했습니다. 한국 정부의 각 부에는 일본인 차관(次官)을 배치, 내정을 지휘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었습니다. 이른바 '차관 정치'입니다. 통감부는 이후 1910년 강제병합 이전까지 약 5년간 군대·사법·경찰권을 단계적으로 접수하면서 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핵심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일제는 한국을 강제병합한 직후인 1910년 9월 통감부를 폐지하고 총독부를 설치했습니다. 통감부가 총독부로 이름이 바뀐 셈입니다. 마지막 통감이던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초대 총독이 되었고, 남산 기슭에 있던 통감부 건물이 그대로 총독부 청사가 되었습니다. 일제는 1926년 경복궁 앞에 새 총독부 건물을 지었습니다. 광복 후 오랜 기간 중앙청으로 불린 건물입니다. 총독은 일왕(日王) 직속으로 일본 육·해군 대장 중에서 선임되었고, 식민지 최고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의 수장(首長)으로서 1945년 광복 이전까지 최고 지배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