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연이 돌아왔다. 카리스마도, 잘해야 한다는 중압감도 벗었다. 이마에 돋았던 실핏줄도, 서슬 퍼렇던 눈동자도, 꼭 쥐었던 주먹도 살며시 풀었다. 다시 돌아온 봄, 3년 만에 드라마에 복귀한 그녀가 선택한 작품은 이다. ‘만덕이 가진 건강한 에너지가 좋아서’다. 복색을 갖추고, 가채를 틀어 올렸지만 그녀는 어느 때보다 가벼워 보였다.

배우로서의 삶을 하루라고 본다면, 그녀는 지금 몇 시를 지나고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던 이미연의 답은 ‘오후 1시’ 였다. 막 식사를 마친 포만감과 하루의 절반쯤 왔다는 안도감, 아침 동안 찌뿌드드했던 몸이 비로소 제 리듬을 찾는 시간이다. 1987년 열일곱에 데뷔해 23년을 달려온 여배우의 삶이 ‘이제야 조금은 편안해졌다’고 했다. 이제는 스스로에게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자’고 되뇔 정도다. 시청률이 걱정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시청률은 하늘이 내리는 거니까, 그저 하늘이 만덕의 편이길 바란다’며 해사하게 웃을 수 있을 정도이기도 하다. 배우 이미연이 의 타이틀롤로 TV에 복귀했다. 이후 사극은 9년 만이고, 드라마로는 이후 3년 만이다.

휴식(休息)
지난 3년이 휴식기만은 아니었다. '벌써 3년이나 됐나요? 정말 그렇게 됐네요'라며 새삼스레 놀란 건 쉬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배우였기 때문이다. 매번 다시 대중 앞에 설 때마다 '대중과 언론의 기대는 10배, 15배, 20배로 늘어난다'는 걸 그녀는 알았다. 그 기대치를 따라잡으려면 늘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야 했다. 작품과 작품 사이의 시간을 으레 공백기라고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공백이 없었다. 들어오는 시나리오와 대본을 꼼꼼히 살펴보고, 기존의 작품과 비교해보고, 연출자를 만나 의견을 조율했다. 그녀의 말을 빌자면 '마음으로 선택하게 되는 작품'을 만날 때까지 예의 작업은 계속됐다. 그리고 숙고 끝에 작품에 들어가면 선택에 대한 책임감, 기대치에 대한 의식 때문에 스스로를 더욱 채찍질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촬영장에는 늘 제시간에 도착해야 했고, 자신의 컨디션과는 상관없이 늘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지금 생각하면 뭘 그렇게까지 다 지키려고 했나 싶어요. 사람이 살다 보면 늦을 수도 있고 잘 못할 수도 있고 그런 건데…. 이제는 좀 여유를 가져보려고 해요. '괜찮아.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열심히 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열심히 하면서도 좀 편안하게 하고 싶어요." 

다시 사극을 한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나는 조선의 국모"라고 외치며 장렬히 최후를 맞이했던 의 그림자가 아직도 그녀에게 남아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최근 드라마 정국은 가히 사극의 춘추전국시대다. 에 이은 의 선전. 과 가 그 뒤를 잇고 있고, 과 같은 시기에 천민 출신 여성의 성공기를 담은 도 방영된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번 작품을 선택했다. 사극이냐 아니냐보다, 어떤 배역인가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김만덕'이 또 카리스마를 요구하는 인물이었다면 저는 하지 않았을 거예요. 오히려 제약이 많은 인물이었죠. 제주 사람, 천민, 여자…. 그런데 그 장벽들을 하나씩 극복해 가잖아요.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거죠. 그게 좋았어요. 씩씩하고 희망적인 인물이라는 게."

실제로 그녀는 자신이 맡은 인물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몰입이란 실제 그 인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기도 한다고 했다.

“‘나는 만덕이야. 와, 나랑 똑같다.’ 이렇게 주문을 외워요. 4개월 동안은 그냥 만덕이가 돼서 사는 거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하고, 많이 웃기도 하고 그래요. 요즘은.”

배우(俳優)
김만덕의 아역을 맡은 심은경(16) 양을 이미연은 각별하게 바라본다. 그녀는 '내가 긴장해야 할 만큼 배역을 흡수하는 게 빠르다' 고 했다. 어린 만덕이는 졸지에 고아가 되어 '할매'(고두심) 밑에서 일을 배우며 자란다. 자신에게 배분된 쌀을 몰래 장에 나가 팔기도 하고, 관아에 쫓기는 신세가 되기도 하고, 물에 빠지기도 하는 등 곡절이 많은 역할이다. 포스터 촬영을 위해 어린 만덕(심은경)과 어른이 된 만덕(이미연)이 장터에서 해후하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사진기사는 장사치로서 서로를 꼿꼿이 바라보기를 원했지만, 이미연은 어린 만덕을 애틋하게 바라보기를 원했다. 숱한 어려움에도 꿋꿋이 추위를 이겨내는 어린 만덕이 가엾고 자랑스러웠다. 그게 만덕의 마음이리라 믿었다. 결국 콘셉트는 바뀌었고 포스터가 완성되었을 때 스태프들은 그녀의 느낌이 옳았음을 알았다.

제주도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그녀는 중간 중간 함께 출연하는 배우 고두심과 귀엣말을 나누었다. 평소 존경하던 선배이기도 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연기 안팎으로 그녀의 정신적 지주다. ‘이 역할은 네가 꼭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선배의 말에 결심을 굳혔을 정도다. 두 배우는 무슨 말을 나누는 걸까?

“실은 제가 낯을 좀 가리는 편이에요. 안 그래 보이겠지만.(웃음) 그래서 여전히 사람 많은 곳에 오면 떨리고 그럽니다. 이번 작품은 특히 선생님이 저보다 훨씬 깊이 알고 계시니까 제가 많이 의지하는 편이죠.” (고두심은 제주 출신 배우로, 1976년 라는 작품에서 김만덕 역을 맡았다.)

그러고 보니 인터뷰 내내 그녀의 대답은 시종일관 간결했다. 그렇다고 성의 없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을 때도 질문하는 사람의 눈을 바라보면서, 때로는 눈썹을 찡긋하기도,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며 경청했다. 숱한 경험으로 말을 하다 보면 으레 장황해지거나 오도되기 쉬운 인터뷰의 속성을 간파했을 그녀의 말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제주도에 온 건 여러 차례 되지만 그녀는 ‘제주도가 좋다’고 했다. 쉬는 동안 내려와서 홀로  때로는 가족과 함께 ‘올레길’을 걷기도 했다며 그것이 상투적인 말이 아님을 증명했다.

"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올레에 보면 이렇게 리본이 묶여 있거든요. 그런데 어떤 길은 가다 보면 이게 길인가 싶을 정도로 길이 외지기도 해요. 뱀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아직도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죠.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해본 일이 없는데, 최근에는 처음으로 '나중에 이런 데 내려와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 싸움이 남아 있다. 얼마 전 의 미실 역으로 사극 데뷔를 훌륭하게 해낸 절친 고현정의 후광과의 싸움도 아니고, 극중에서 동문객주 만덕의 라이벌 역으로 분한 서문객주 박솔미와의 대결도 아니다.

“배우에게는 다른 누가 아닌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중요해요. 누구를 보고 경쟁의식을 갖는다거나 자극을 받는 건 스스로에게 좋지 않죠. 현정이는 저하고 동국대 연극영화과 동기동창생(90학번)입니다. 전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잘 해내서 저도 기뻐요. 박솔미 씨는 같은 여자가 봐도 몸매가 너무 예쁘고(웃음). 여배우로서는 최근의 ‘여자 사극 열풍’이 경쟁할 일이라기보단 반가운 일이죠.”

김만덕(1739~1812)
조선시대 여자 상인으로 제주도에 대기근이 닥치자 전 재산을 풀어 육지에서 사온 쌀을 모두 구휼미로 기부하여 기아 상태의 제주도 민중을 구제했다. 이 때문에 제주에서는 '의녀'(義女)로 불린다. 전 재산을 풀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김만덕은 '관의 허락 없이 제주도민은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규칙을 깨고 한양에서 정조임금을 알현하고 내의원 의녀반수 벼슬을 받기도 했다. - 출처

욕심(慾心)
그녀에게는 욕심이 있다. 마흔에도 더욱 빛나는 외모를 보면 그녀가 얼마나 자기관리에 철저한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큰 욕심은 사람들이 여배우를 볼 때 '주름이 얼마나 늘었는가가 아닌, 눈빛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봐주길 바란다는 거다. 10대에는 하이틴 스타로, 20대에는 스타 커플에서 돌아온 솔로로, 30대에는 영화와 드라마의 원톱으로 불렸던 그녀에게 단 하나 변하지 않는 이름은 '여배우'였다. 그녀는 캐릭터의 힘이나 상대 배우의 상승세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존재감만으로 작품 전체를 이끌어가는 몇 안 되는 배우이기도 하다. 그렇게 23년을 쉼 없이 달려왔음에도 그녀의 시계는 이제 막 오후 1시를 지나고 있다. 점심을 먹고, 차를 한 잔 마시고 잠시 숨을 돌리고 나면 본격적으로 레이스를 즐길 수 있을 시간이다. 더구나 이제 막 연기가 즐거워지려는 참이다. 그녀에게는 아직 하고 싶은 일도, 배우고 싶은 일도 많다. 올 초에는 네팔로 자원봉사 활동을 다녀왔다. 네팔 소녀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이제 막 4개월의 대장정을 시작한 그녀는 말했다.

“만덕은 사업이 성공한 뒤에 가난한 이들을 도왔는데, 당시 제주도에 기부한 금액이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600억~700억원 정도 된다고 해요.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만덕이 정말 큰 인물이란 생각이 들죠. 작품이 끝나고 나면 한 단계 더 성장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매번 작품을 통해서 하나씩 배워 나갑니다.”

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너는 네 욕심을 보았으니 괜찮을 것이다.
세상에는 제 욕심에 눈이 멀어 초심을 잃는 사람이 많다.'

이미연의 욕심은 여배우로서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이 욕심과 초심이 그녀 안에서 공존하는 한, 이 배우의 눈빛은 더욱 깊어갈 것이다.

☞ 여성조선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