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首都)는 항상 정치적 판단에 따라 결정된다. 위치에 따라 처음부터 수도가 될 운명을 가진 도시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K A 베슬러는 '정치지리학'에서 썼다.
"폐하께서 장산성(獐山城)에 행차하셨습니다!" 689년(신문왕 9) 윤 9월 26일 신라 서라벌 귀족들이 긴장하며 일제히 떠올린 생각은 이랬을 것이다. "기어이… 그 일을 실행하려고 하시는 것인가!" '그 일'이 도대체 무엇일까?
삼국사기에 날짜까지 기록된 이 행사를 위해 신문왕은 56명의 대규모 가무단을 거느리고 지금의 경북 경산 부근인 장산성에 나타났다. 신문왕의 관심은 장산성보다는 코앞에 있던 넓은 벌판 달구벌(達句伐)에 있었다.
■군사적 방어 쉬운 분지… 농업 생산력도 풍부
지금의 대구인 그곳으로 천도(遷都)를 감행하기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던 고구려·백제·발해와는 달리, 신라는 1000년의 역사 동안 오직 서라벌(경주) 한 곳에만 왕경(王京)을 유지했다.
이것은 신라가 지역적으로 정체됐다는 비판의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랬던 신라가 단 한 번 천도를 꾀한 적이 있다. 당의 대군을 격퇴한 지 3년 뒤인 679년(문무왕 19)에 왕은 궁궐을 중수하고 동궁을 새로 건설했다.
681년에는 또다시 수도에 대형 토목공사를 계획했다. 그런데 문무왕이 멈칫했다. 뭔가 불안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를 어쩐다…. 그렇지! 의상(義湘) 대사에게 물어봐야겠다.' 왕을 만난 의상은 선문답 대신 직설화법을 썼다.
"비록 초야의 띠집에 살아도 정도(正道)를 행한다면 복이 오래갈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사람을 힘들게 해서 성을 쌓을지라도 아무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나라 전체가 오랜 전쟁에 지쳐 있었고, 언제 또 당나라가 침략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리한 사업을 벌여 백성을 괴롭혀서야 되겠느냐는 간곡한 타이름이었다. 문무왕은 충고대로 공사를 포기했고 한 달 뒤에 죽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자 이번엔 왕권과 귀족권의 충돌이 일어났다. 왕의 장인 김흠돌을 비롯한 대신들이 한꺼번에 숙청됐다. 왕과 반대편에 섰던 진골 귀족들의 세력은 크게 약화됐으나 여전히 왕권을 견제하고 있었다.
■서라벌 귀족 떨쳐버리고 왕실 강화 노려
신문왕은 자신에게 포섭된 무열왕·김유신계의 일부 귀족과 기반이 없는 신진 관료를 중용했다. 옛 백제·고구려계 포섭에도 나섰다. 반대파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학자들은 바로 이런 구도 속에서 '달구벌 천도'가 계획됐다고 본다.
그런데 왜 대구였던가? 분지 지형이기 때문에 주변 산성을 이용한 군사적 방어가 쉽고 낙동강 수계와 연결돼 있어 수로 교통이 편리했으며 농업생산력이 풍부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곳엔 별다른 토착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서라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귀족 세력들을 모두 떨쳐버리고 새로운 통일왕국의 수도를 건설해 왕실을 튼튼히 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왕은 세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통일왕국 수도'로 삼기에 대구는 여전히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다. 이 점만 본다면 오히려 중원경(충북 충주)쯤이 적합했을 수도 있다. 700년 고도(古都) 서라벌을 버릴 명분으로는 취약했다.
■왕의 편에 선 귀족들도 천도 반대로 돌아서
두 번째 문제는 왕 편에 선 귀족들 역시 오랜 세월 동안 서라벌에 뿌리를 내렸다는 사실이었다. 신문왕의 정치적인 지지세력이 여기서 천도 반대로 돌아섰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피해가 결국 하층민에게 돌아갈 재정과 인력수급 문제였다. 신문왕은 의상대사 수준의 원로에게 자문하는 부왕의 전례조차 생략하고 있었다.
천도 문제가 논의되는 와중에서 얼마나 사회적 갈등이 증폭됐는지는 687년 한 제사 때 왕이 올린 제문에서 짐작할 수 있다. "요즘 임금으로서 도리를 잃고 의리가 하늘의 뜻에 어그러졌는지… 몸이 벌벌 떨려 마치 깊은 못과 골짜기에 떨어진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는 달구벌 천도 계획의 결과를 아주 간략하게 기록했다. "미과(未果·실현 못함)." 실패한 것은 천도뿐이 아니었다. 이듬해인 690년 천도 작업의 추진자로 보이는 중시 원사(元師)가 실각했다. 신문왕마저 돌연 사망한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692년이었다.
입력 2010.02.06. 08:04업데이트 2010.02.28.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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