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6일자 대한매일신보는 '북간도로 가는 까닭'이란 기사를 실었다.

"함경북도 경성군 등지에 사는 한국인민은 작년 9월부터 금년 4월까지 연속하여 북간도로 이사한 자가 1,304호인데 근일 내부에서 그 근인을 조사한 즉 자연재해가 심하여 생활이 극히 가난하므로 살 곳을 찾아 이사함이라 하고 또 근일에 일본 사령부에서 사격장을 설치하려고 병영을 건축한다 하여 불편함을 피하여 이사함이라더라."

조선시대 외교사절이 아니고는 해외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19세기 전반까지 이민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개항기에 이민이 시작됐다. 이 무렵 이민은 가난한 농민이 자연재해로 먹고살 길이 없거나 일제의 압박을 피해 이주했다.

1860년대 조선과 중국의 국경 통제력이 약화되자 이주가 시작됐다. 1870년 이미 2000여명이 압록강을 건너 30여개 마을에 정착했다. 1881년 중국이 만주의 봉금(封禁)을 해제한 것도 한국인의 이주를 촉진했다.

연해주 지역에도 조선인이 정착했는데, 이는 1858년 러시아가 아이훈 조약으로 차지한 연해주의 개발을 위해 자국민의 이주를 장려하자, 농토 없는 조선인들이 여기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1894년 연해주를 방문한 비숍 여사는 '한국인의 에너지와 근면함, 그리고 검소하고 유족하고 안락한 집의 가구'를 보고, "비로소 이 나라의 더욱 큰 가능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고 말했다. 1898년 독립신문은 "연해주 한국인들이 관리를 투표로 선출하여 지방행정이 잘 되고 있다"며, 국내에서도 그 제도의 도입을 건의하였다. 만주와 연해주에 진출한 한국 농민은 쌀 생산에 성공하여 쌀의 북방한계선을 높였다.

1903~05년 사이 7000명 이상의 한국인이 하와이로 이주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왼쪽 사진은 하와이에 먼저 도착한 한인들이 새 이민자들을 환영하는 모습, 오른쪽 사진은 1903년 발행된 하와이 이민자 여권 /출처='100년을 울린 겔릭호의 고동소리') 미국인 헐버트는 "하와이에 온 한국인은 정열적이며, 자립정신과 철저하고 꾸준한 정신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 한인 2세는 일본인·중국인은 물론 백인보다 교육열이 높았다. 이들 중 1037명은 1903~07년 미국 본토로 건너갔다.

1905년에는 1033명이 멕시코로 이주했는데, 그곳 애니깽 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실상이 '신보'(1907.9.17.)를 통해 알려졌다. "일을 하다가 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매를 맞고 곤란한 것을 견뎌내지 못하여 도망하다가 경무청에 잡히어 갇힌 자가 많고 잡히면 볼기가 25개요 두 번 도망하다가 잡히면 볼기가 50개라. 심지어 처자를 버리고 달아난 자도 있고 어저귀 나무에 목을 매어 죽은 자도 있다."

1910년 한반도 거주민 1700만명 중 약 30만명(1.7%)이 해외로 이주했다. 나라별로는 중국 22만명, 러시아 6만여명, 일본 2527명, 하와이 약4000명, 미국 본토 약 1000명, 멕시코 974명이었다. 이들은 힘겨운 생활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 같은 역사가 오늘날 전 세계 한민족 네트워크의 뿌리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