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제4대 임금 광종(光宗·925~975)은 태조 왕건과 신명태후 유씨(劉氏) 사이에서 난 둘째 아들로 친형인 정종의 뒤를 이어 949년 왕위에 올랐다. 명민하고 과감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광종은 재위 초에는 연호를 정하고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부르는 등 중국과 대등한 황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려 했다.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광종 9년(958) 5월에는 과거제를 시행했다. 더불어 국토가 서북과 동북쪽으로 확장되자 성책과 요새를 구축해 거란이나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는 등 국방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래서 태조 왕건 사후 흔들리던 왕권을 강화했다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왕권이 너무 강화된 때문일까? 광종 11년(960)부터 광종은 누가 참소(讒訴)를 하면 확인도 않고 의심받는 사람을 죽이거나 내쫓아버렸다. '고려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이때로부터 아첨하는 자들이 득세하여 충성스럽고 현량한 사람들을 모함하였으며 노비가 제 주인을 걸어 고소하고 아들이 제 아비를 참소하여 감옥이 항상 가득차게 되었다." 그 바람에 임시감옥이 곳곳에 설치되었다. 왕실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고 심지어 왕의 맏아들 왕주(훗날의 경종)도 광종의 의심을 받아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왜 광종은 이런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편 것일까? 보기에 따라서는 왕권강화 차원에서 이뤄진 호족세력 길들이기로 볼 수 있다. 광종의 의심은 호족의 방패막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왕실 사람들에게로 확산됐다. 그 바람에 혜종의 아들 흥화궁군(興化宮君)과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慶春院君)도 역모에 연루됐다 하여 사형을 당했고 맏아들 왕주까지도 의심했던 것이다. 혜종은 광종에게 이복형, 정종은 친형이었다. 아들도 죽이려는 판에 조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무자비한 살육과 공포의 세월이 10년쯤 돼가던 광종 19년 광종은 그동안 자신이 아첨과 참소에 따라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에 가책을 받는다. 충청도 은진 관촉사의 거대한 미륵불은 바로 이때부터 조성작업에 들어가 38년 후에 완성된다. 자신의 죄업을 불력(佛力)으로 씻어보려는 몸부림이었던 셈이다.

재위 26년째인 975년 광종은 51세를 일기로 숨졌다. 그리고 태자로 있으면서도 불안에 떨어야 했던 왕주가 왕위를 잇는다. 제5대 임금 경종(景宗·955~981)이다. 조선의 경종만큼이나 고려의 경종도 그 역할이 미미하기 그지없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구신(舊臣)은 40여명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대부분의 신하를 죽이거나 내쳤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공포정치의 폐단을 잘 알고 있었던 21살의 신왕은 먼저 대사면령을 내려 참소로 귀양갔던 사람을 돌아오게 하고 억울하게 옥살이하던 사람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그리고 임시감옥도 헐고 참소한 글들도 모두 불살라버렸다.

그런데 그가 정권을 맡긴 집정(執政·정승에 해당) 왕선(王詵)이 문제였다. 호족 출신인 왕선은 일종의 복수법을 만들 것을 건의했고 힘 없는 경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왕실에 대한 호족세력의 반격이었다. 정치보복의 제도화라 할 수 있는 이 야만적인 복수법 시행으로 인해 광종 때 참소를 당했던 사람이 참소한 사람에게 똑같이 보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나라가 앞장서서 무법천지를 조장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다시 서로 마음대로 죽이기를 시작했고 억울한 일들이 생겨났다."

이 와중에 왕선이 복수법에 기대어 왕건의 아들인 천안부원랑군(天安府院郎君)을 교살(絞殺)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천안부원랑군은 왕건과 천안부원부인 임씨 사이에서 난 효성태자이다. 또 왕건과 숙목부인 사이에서 난 원녕태자도 같은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 했다. 두 사람은 다 왕실의 어른인 셈이었다.

사정이 이 지경이 되고 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경종은 1년이 훨씬 지난 경종1년(976) 11월 왕선을 집정에서 내쫓아 멀리 귀양을 보내고 마침내 복수법을 금지했다. 그리고 집정 한명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때부터 집정을 2인으로 해서 좌우(左右) 집정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20대 초반의 경종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에 흥미를 잃었다. '고려사'의 사평(史評)이 엄정하다. "왕은 온순하고 무던하며 인자로웠고 유희를 좋아하지 않더니 말년에 와서 정치에 게을러져서 매일 오락을 일삼고 주색에 빠졌다. 또 바둑을 즐겨서 소인들을 가까이하고 착한 사람을 멀리하였다. 이로부터 정치와 교화가 쇠퇴하였다." 981년 재위 6년 만에 세상을 떠날 때 그의 나이 26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