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금요일 오후 7시, 서울 강남의 한 바둑교실에 프로·아마추어 기사(棋士)와 연구생 20여명이 모여 앉는다. 2시간 동안 바둑 이론을 배우고 최근 대국을 복기(復棋)하는 것까지는 여느 바둑교실과 똑같다. 다른 점은 모든 대화가 영어로 오간다는 점이다.

지난달 28일, 역삼동 한상대바둑교실. 수강생 김준상(27·아마 6단)씨가 스승인 한상대(68) 전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 앞에서 최근 네덜란드에 배낭여행 갔다가 루마니아 고수와 치른 대국을 복기하고 있었다.

"Actually there is a saying, 'Don't make empty triangles', but I made a mistake(바둑판에 '빈 삼각'을 만들지 말라고 배웠는데 실수로 빈 삼각을 만들고 말았어요)."

빈 삼각은 바둑알을 ㄱ자 혹은 ㄴ자 모양으로 늘어놓는 것으로, 세력이나 집을 늘리는 데 비능률적이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좋지 않다.

한 전 교수가 물었다. "What do you think about your overplay(무리수를 둔 것 아니니)?" 김씨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한상대바둑교실에서 수강생들이 영어로 바둑을 배우고 있다.

수강생들이 바둑을 영어로 배우는 것은 세계 바둑계가 변하고 있어서다. 한 전 교수는 "우리나라 바둑인구는 해마다 2만~3만명씩 줄고 유럽 바둑인구는 꾸준히 늘고 있다"고 했다. 대한바둑협회 김성준(48) 국제분과 부위원장은 "최근 10년간 러시아 바둑인구는 3만명에서 5만명으로, 독일은 1만5000명에서 2만5000명으로 늘었다"고 했다. 같은 기간 동유럽과 이스라엘에서도 바둑인구가 3배쯤 늘었다.

한 전 교수는 "영어가 활로(活路)"라고 했다. 국내 초·중·고 연구생 1000여명 가운데 프로기사로 입단하는 사람은 매년 8명 안팎이다. 프로가 돼도 바둑대회 상금으로 먹고살기는 쉽지 않다. 한국기원에 따르면, 국내 프로기사 238명 가운데 대국료 수입이 연간 3000만원 이상인 사람은 50명뿐이다. 대국료 수입이 연간 1000만원에 못 미치는 프로기사도 80여명이나 된다. 한 전 교수는 "영어를 배우면 바둑사범으로 유럽에 진출할 수 있다"고 했다.

한 전 교수는 1975년부터 20년간 호주에 살며 호주바둑챔피언을 12번 지냈고, 귀국 후 명지대에서 바둑영어를 가르치다 2005년 바둑교실을 냈다. 이곳을 거쳐 간 수강생 100여명 가운데 10명이 유럽에서 사범으로 일하고 있다.

바둑영어는 만만치 않다. 바둑을 모르면 한국말로 들어도 알쏭달쏭한데 영어까지 익혀야 한다. 가령 '곤마(困馬·살기 어려운 돌)'는 영어로 '쫓기는 돌(pursued stones)'이라고 한다. '이적수(利敵手·상대방를 이롭게 하는 수)'는 '나야 고맙지(thank you move)'다. '호구(虎口·바둑돌 석점에 에워싸인 공간)'는 문자 그대로 '호랑이 입(tiger mouth)'이다.

한 교수가 정리한 바둑용어 300여개 중 3분의 1은 일본말이 영어로 굳어진 것이다. 먼저 둔다는 뜻인 '센테(先手·sente)'가 대표적이다. 또 다른 3분의 1은 정석(定石·Jungsuk·일정하게 수를 놓는 형식)'처럼 한국어를 소리 나는 대로 옮긴 것이다. 나머지는 '빈 삼각'처럼 영어로 뜻을 푼 것이다.

박병규(28·프로 七단)씨는 "꼭 해외진출이 아니라도, 한국에 바둑을 배우러 오는 외국인이 늘어나면 그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수업을 듣던 벨기에 유학생 토마스 코너(Connor·21·아마 3단)씨가 "벨기에에는 사범도, 교재도 없어 한국에 왔는데 영어로 가르치는 곳이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