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 선생께서는 건강한 정신뿐 아니라 건강한 육체도 중요하게 여기셨죠. 매일 새 벽 4시에 일어나 구보를 하며 체력단련을 하셨어요.”일가 김용기 선생 탄생 100주 년 기념서를 들어 보이고 있는 김상원 일가재단 이사장.

지금으로부터 46년 전인 1963년 3월. 경기도 광주군의 농민교육기관 '가나안 농군학교'에 30세의 젊은 판사가 들어섰다. 판사는 농민운동가 일가(一家) 김용기 선생(1909~1988)을 평소 존경해왔다며 만나겠다고 했다. 김용기 선생과 '젊은 판사'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젊은 판사'는 '근로, 희생, 봉사'라는 일가 선생의 생활철학을 실천하면서 법조인으로서도 성공해 대법관의 자리까지 올랐다. 1988년부터 6년간 대법관을 지낸 김상원(76)씨. 그는 지금 일가재단 이사장을 맡아 일가 사상 전파에 앞장서고 있다.

"선생께서는 창씨개명·동방요배(東方遙拜)·신사참배를 모두 거부한 애국자셨고, 농촌지도자셨고, 개척자셨죠. 그분의 애국사상과 근로 의식이 큰 감명을 주었어요. 저도 그분처럼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올해는 일가 선생이 탄생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다. 1일 오전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김 이사장은 "일가 선생의 가르침 덕분에 법관 생활을 하면서 물질적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고, 어떠한 외부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이천농고와 서울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진로를 바꿔 법관이 되었지만 내 마음속엔 늘 농심(農心)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했다. "농업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못해 선생을 따랐지요. 73년 강원도 원주에 제2가나안 농군학교가 생긴 후에는 직접 가서 교육도 받았어요."

그는 "어느 날 강연에서 선생께서 조 이삭을 들어 보이면서 '이것이 진실이요, 진리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조가 영글어 수확할 때까지 김매고, 거름 주고 피땀 흘려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일하고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는 그 말씀이 그렇게 와 닿았어요."

일가 선생이 타계한 이듬해인 1989년, 평소 선생을 따르던 이들이 기금을 출연해 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재단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김 이사장은 선뜻 이사직을 수락, 재단 창립멤버가 됐다. 2000년에는 제2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10년째 무보수 봉사직을 맡고 있는 셈이지만 그는 "봉사란 원래 시간과 정성을 들이고 물질을 내놓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일가재단은 매년 아시아 전역의 농업·사회공익 부문에서 일가 선생의 정신을 계승한 인물을 찾아 상을 주고 있다. 올해엔 일가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40세 안팎에 주는 '청년 일가상'도 만들었다. 5일 오전 11시 농업중앙회 대강당에서 일가상 시상식과 제2회 가나안 세계 농군대회, 100주년 비전 선포식을 겸한 '일가 김용기 탄생 100주년 기념대회'가 열린다. 이에 앞서 4일 오후 1시에는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일가의 생애, 사상, 그리고 글로벌 빈곤퇴치운동'을 주제로 한 국제 세미나가 있다.

김 이사장은 "현재 제2가나안 농군학교가 있는 원주에 선생의 성함을 딴 거리를 만드는 것을 추진 중이며, 선생의 일대기를 영문으로 번역하는 등 앞으로 할 일이 많다"면서 "비누 한 장도 허투루 쓰지 않았던 그분의 절약정신과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하셨던 근로정신을 널리 알리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