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거창군에 들어서면 '거고', '대고' 얘기를 숱하게 듣는다. 이 지역 라이벌 고교인 거창고와 거창대성고를 줄인 말이다.
"이번 입시에서 대고(거창대성고)가 거고(거창고)랑 똑같이 서울대에 보내지 않았습니꺼? 우리가 금세 따라잡을 겁니더." (거창대성고 3학년 A군)
"대고는 저희 신경 쓰는 것 같던데 저희는 안 그래예." (거창고 2학년 B군)
두 학교가 올해 서울대에 나란히 4명을 입학시킨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두 학교는 서울대 진학생 숫자만 경쟁하는 게 아니다. 두 학교는 매달 서로 명사들을 초청해 학생들을 상대로 강연회를 연다.
거창고에서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 장향숙 의원, 김순권 교수 등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자 대성고에서는 소설가 조정래씨, 하일성 KBO 총재 등을 불러 맞불을 놓았다. 매년 거창고가 주최하는 거창음악제에 외부 합창단이 몰려오자 대성고는 동문들이 모금을 해 유명 앙상블팀을 불렀다.
특별활동에서도 경쟁이다. 남자 고등학교인 거창대성고 학생들은 매년 지리산과 한라산을 걸어서 넘고, 남녀공학인 거창고 학생들은 6월마다 전교생이 학생들만의 힘으로 텐트를 치고 지리산 기슭에서 야영을 한다.
전국 232개 시·군·구 중 군(郡) 단위 지역 중 최근 5년간 꾸준히 최상위권을 지킨 곳은 전남 장성군과 경남 거창군이다. 이 중 거창군은 학교 간 선의의 경쟁을 통해 학생들의 학력이 올라간 경우다.
15일 오후 8시 거창고등학교를 찾았을 때 학생들은 한명도 빠짐없이 교실에서 책을 펴고 앉아 있었다. 교사들이 교실마다 앉아서 감시하는 게 아닌데도 조는 학생이 한명도 없었다. 학생들은 학교 선생님들이 만들어준 보충 교재로 공부하고 있었다.
교사들은 교무실에서 학생들의 질문을 받거나 학생들 모의고사 결과를 분석했다.
같은 시각 거창고에서 800m 떨어진 거창대성고 자율학습실도 불이 밝게 켜져 있었다. 이 학교 학생들은 교실이 아니라 별관 1층에 마련된 자율학습실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거창대성고는 전교생을 한번에 수용하는 대규모 자율학습실을 학년별로 각각 1개씩 운영한다.
이 학교 연구부장 박우상 교사는 "일요일에도 자율학습이 있다"며 "월요병을 없애기 위한 우리만의 전략"이라고 말했다.
양 학교의 자존심 싸움은 결과적으로 두 학교의 실력을 키웠다. 2009학년도 수학능력시험에서 거창고는 과목별로 86~91%의 학생이 1~4등급에 속했고, 거창대성고는 62.1~71.1%가 4등급 이상을 받았다. 이 두 학교의 실력 향상은 거창군의 우수한 성과와 직결됐다. 6만4000 인구 중 32.8%가 농업에 종사하는 시골 동네인 거창군은 지난 2009학년도 수능 시험에서 언어, 수리 나, 외국어에서 중상위권(1~4등급) 학생비율이 전국 20위 안에 들었다.
이 두 학교에 영향을 받은 다른 학교들의 약진도 계속되고 있다. 공립고등학교인 거창여고의 경우 두 학교를 벤치마킹해 기숙사를 세웠다. 특히 2006년에 농산어촌 우수학교에 선정되면서 신입생들의 성적도 좋아졌다. 실업계 고등학교였던 거창중앙고등학교는 3년 전 인문계로 전환하면서 학생들에게 몰입식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