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독약품, 샘표식품, 삼천리그룹…. 30년 넘게 한 해도 빠지지 않고 흑자배당을 해온 기업들이다. 이들이라고 위기가 없었던 게 아니다. 다만 남보다 위기를 잘 관리하는 경영 리더십과 노하우가 달랐다. 끝 모를 세계경제의 위기 속에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만큼 경영환경이 깜깜하다. 장기 흑자배당 기업 CEO들이 어떻게 위기를 헤쳐나갔을까.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 진행 중이던 작년 11월, 한독약품 김영진(金寧珍·52) 회장은 노동조합으로부터 뜻밖의 면담 요청을 받았다.
"회사가 어느 때보다 어려운 상황인 걸 구성원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위기 극복을 위해 올해 임금협상을 회사에 위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최운학 노조위원장)
임금협상 시즌보다 4개월이나 앞서, 업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나온 희소식이었다. 김 회장은 최 위원장의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노조의 소중한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힘을 모아서 다시 한 번 뛰어봅시다."
김 회장은 홀로 남은 집무실에서 회상에 잠겼다. IMF 외환위기로 기업들이 줄도산하던 1997년 12월…. 그때도 지금과 꼭 같았다. 부친(김신권 현 명예회장)의 가업을 물려받아 사장에 취임한 지 2년 째였다.
1997년 12월 한 달에만 60억원의 환차손이 발생, 영업이익(136억원)의 절반이 날아갔다. 3년 전 공장 신축 때 받은 외화 대출 때문이었다. 환율 폭등으로 수입약품 원료 값이 치솟았고, 대출금리(연 20% 이상)는 살인적이었다. 20~30년 장기 근속한 직원들이 하나 둘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다. "나중에 잘리느니 퇴직금 챙겨 미리 나가겠다"는 분위기가 회사를 뒤덮었다.
김 회장은 컴퓨터 앞에 홀로 앉아 A4 2장에 걸쳐 편지를 써 내려갔다.
"IMF 경제위기 상황에서 매출에 차질이 생기고 거액의 환차손이 발생하는 등 전에 없는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회사는 인위적인 인력 감축 없이 이 난국을 헤쳐나가고자 합니다…" 편지는 12월 15일 전 직원 700여 명의 가정으로 배달됐다.
"절대 감원을 하지 않을 테니 회사를 믿고 열심히 일해달라"는 최고경영자의 '고용 보장' 약속이었다. 김 회장은 동시에 일반 직원들을 대상으로 인센티브를 도입할 것을 지시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동기 부여가 우선이었다.
이듬해 1월 노조는 자발적인 임금 위임으로 경영진의 고용보장에 화답했다. 직원들은 야근을 마다하지 않고 똘똘 뭉쳤다. 독일 합작사인 훽스트(현 사노피-아벤티스)에서 현금 20억원 가량을 받아 급한 불도 껐다. 서서히 경영이 정상화됐다.
한독 노조는 회사가 위기에 처할때마다 동반자가 돼주었다. 한독 노조는 1975년 창업주인 김신권 명예회장이 독일에 다녀온 후 "독일 기업에서는 노조가 사원의 권익을 대표하더라. 우리도 하나 만드는 게 어떠냐"고 권유해 설립됐다.
1998년 회사는 4억3000만원의 순익을 냈고, 이보다 많은 5억8000만원을 주주들에게 배당했다. 한번 받은 신뢰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답한다는 믿음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한독약품의 흑자배당 기록은 올해로 51년째다.
김 회장은 "외환위기 때보다 1980년대 제약업계의 과당경쟁이 더 심각한 위기였다"고 말한다. 아버지 밑에서 경영조정실 부장으로 일하던 시기였다. 중소 제약업체가 난립하면서 출혈경쟁으로 업계 전체가 위기를 맞았다. 한독약품 역시 신약개발이 지지부진해 성장동력을 상실하며 업계순위가 1980년 6위에서 1990년 14위로 뚝 떨어졌다.
김 회장은 "전체 조직이 동맥경화에 빠져있었다"고 회고했다. 제약사에서 '끗발'있는 2층 영업부서 직원들이 관리부(1층), 마케팅부(3층) 등 다른 부서 직원들을 무시하기 일쑤였고, 1·3층 직원들은 이를 갈았다. 김 회장은 "회사가 뿌리째 흔들리는데도 위기의 실체를 눈앞에 제시하고, 직언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일선의 현장 직원들을 주목했다. 위기의 원인과 개선방안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최일선에서 뛰는 현장 직원이라고 판단했다.
전국 판매지점 영업사원 15명을 서울로 불러모아 '난상 토론회'를 가졌다. 예상은 적중했다. 회사에 대한 불만과 함께 각종 경영개선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실적 올려봐야 다음해 목표치만 높아지는 성과체계가 근본부터 잘못됐다"거나 "제품 수가 너무 많다"는 등 간부들로부터 들어보지 못한 의견이 속출했다. 간부들의 반발 속에서도 몇 달간 토론회를 이어갔다.
김 회장은 토론회 결과를 토대로 강도 높은 조직 개혁에 착수했다. 100여가지 제품을 선택과 집중 원칙에 따라 절반으로 줄였다. 인사평가시스템도 절대평가에서 상대평가로 바꾸고, 직원들 급여와 복지는 업계 최고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우수한 인재들이 하나 둘 회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히트상품이 된 피부연고제 '더마톱'과 위궤양치료제 '록산'도 이때 출시됐다.
한독약품은 올해 연구개발(R&D)에 128억원을 투입, 자체 개발한 당뇨치료제를 상반기 중에 출시하며 신약 중심의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칠 계획이다. 김 회장은 "위기일수록 CEO부터 직원까지 한마음으로 비전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면 언제나 기본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