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가 몰락하고 오랑캐의 나라 청이 들어선 17세기 후반, 조선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적 세계관은 수정돼야 했다. 북벌로 중화를 복구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물론 반대 목소리도 나왔다. 그로 인해 조선 정계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끝까지 청에 저항해야 할 것인가, 새로운 중화의 실체를 인정하고 국제정세 변화에 따를 것인가? 그것은 외교 문제인 동시에 조선이라는 국가의 통치철학에 관련된 문제였다. 이때부터 집권당인 노론의 율곡학파 안에서 이른바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이 시작됐다. 성리학의 확장 개념인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었다.
율곡 이이의 후예로 기호학파의 적통인 권상하(1641~1721)의 문하에서 논쟁은 촉발됐다. 논쟁의 주요 패널은 권상하의 제자들인 한원진(1682~1751)과 이간(1677~1727)이었다. 한원진은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다. 또 만물이 각기 천명을 가지고 있지만, 오직 인성에만 오상(五常, 인의예지신)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한편 이간은 인성과 물성이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이다.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 볼 때 사람과 사물은 서로 같으나, 각기 다른 실체로 볼 때 서로 기질지성(氣質之性)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또 사람과 사물은 각각 오상의 성을 갖는데, 다만 기질의 차이에 따라서 사람은 순수한 오상을, 사물은 잡된 오상을 가진다고 했다.
1712년, 이간은 스승 권상하에게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의 마음은 순선(純善)한 것이 아닙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권상하는 한원진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며, 이간의 설을 수긍했다. 하지만 나중에 한원진이 "사람이 태어나면서 기질에 따른 성을 가지게 되므로 이미 선악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며 자신의 견해를 보완해 설명했다. 그러자 권상하는 다시 한원진의 설을 인정했다. 오락가락하던 권상하는 결국 한원진과 한편이 됐다. 이에 이간은 다시 스승과 한원진의 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면서 논쟁은 본격화됐다.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은 마음의 본성에 대한 문제와 성범심동이(聖凡心同異) 논쟁, 즉 성인과 범인의 차이를 밝히는 논쟁으로 이어졌다. 이간은 마음의 본성은 기질의 영향을 받지 않아 순수하고 선한 것이라고 했다. 사람은 성인과 범인을 막론하고 누구나 마음속에 밝음과 덕을 가지고 있지만 범인의 경우 그 기질지성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성인과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범인도 기질을 좋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때문에 이간의 주장은 상대적으로 실천적인 경향을 갖게 됐다.
하지만 한원진은 마음의 작용에 역점을 두면서 마음의 본성이 이미 선악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마음의 본바탕이 기로 이뤄지기 때문에 그 기질 차이에 따라 선악의 가능성이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인은 청수(淸秀)한 기질을 타고나서 그 마음이 텅 빈 거울처럼 항상 선의 본질을 유지하지만, 범인의 마음은 기질이 탁해 선행으로 발휘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범인은 그 기질이 나쁘기에 성인에 이르기가 어렵다고 본 것이다.
한편, 서울 근교 지역인 낙하(洛下)에서 살았던 김원행, 박윤원, 홍직필 등이 이간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래서 이들의 주장을 낙론(洛學)이라 했다. 반면에 윤봉구, 최징후, 채지홍 등 호서지방에 사는 학자들은 주로 권상하와 한원진의 주장을 거들었다. 이들의 주장은 호론(湖論)이라 했다. 그리하여 인물성동이 논쟁을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 부르게 된다.
청나라가 대륙의 실세로 자리를 잡고, 북벌론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그러자 조선의 통치자들은 청을 새로운 중화로 볼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논쟁을 피해갈 수 없게 됐다. 이때 인물성동이론과 성범심동이론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맞이한 조선 사회의 정치논쟁에 사상적 논리를 제공한 것이었다.
호론의 관점에 따르면 '한 번 오랑캐면 영원한 오랑캐'였다. 따라서 청나라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기존의 화이관을 분명히 밝히며 북벌의 명분을 찾았다. 반면 낙론에서는 인성과 물성을 같은 것으로 보면서 범인도 노력하면 그 기질이 변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청이 비록 오랑캐의 나라지만 잘 교화되면 새로운 중화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기존의 화이관을 대폭 수정하면서 청과의 공존을 모색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 낙론의 주장은 나중에 홍대용, 박지원 등 북학파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