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 한신대 교수·사회철학

정조의 비밀서신이 화제다. 정적(政敵)인 심환지에게 보낸 299통의 편지가 발견된 것이다. 권모술수와 격정에 가득 찬 내용 때문에 실망하는 사람도 있다. 조선 중기 르네상스를 이끈 개혁군주에 걸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사(正史)를 통해 드러나는 당대 상황과 정조의 성품에 밝은 전문가들의 반응은 차분하다.

호학(好學) 군주인 정조가 백성의 스승을 자처했지만 무엇보다 그는 현실정치가였다. 할아버지 손에 비명횡사한 아버지의 운명과 반대파의 끊임없는 음해를 무릅쓰고 왕이 된 정조가 '이슬만 먹고 사는' 군주일 순 없다. 마키아벨리스트가 아니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권력을 얻고, 또 유지하고 싶다면 냉철해야 한다는 게 마키아벨리의 교훈일 텐데, 정조는 그 모범을 보여준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개입한 포도대장 구선복을 내심 증오하면서도 권력 일선에 놓아둘 뿐 아니라 공개 칭찬까지 하는 것이다. 정조가 구선복을 처형한 것은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굳힌 즉위 10년 후였다. 정조가 총애한 정약용조차, 칼을 내던지는 정조한테 '협박당한' 경험을 《여유당전서》에 남기고 있다. 정치의 복합성을 감안하면, 정조의 마키아벨리스트적 얼굴은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흔히 '악의 교사'라 불리는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군주는 사자처럼 잔혹하고 여우처럼 간교해야 하며, 약속을 지키는 것이 군주에게 불리할 때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고, 선한 성품을 실제 갖출 필요는 없지만 갖춘 것처럼 보여야 하며, 때로 부도덕하게 행동할 태세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패도(覇道)정치와 마키아벨리즘이 동일시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 자신은 결코 그런 의미의 마키아벨리스트가 아니었다. 자신의 정치적 재기를 위해 《군주론》을 썼지만, 위기에 빠진 이탈리아를 구하는 게 그의 궁극목표였기 때문이다. 피렌체 공화국 핵심관료였던 경험을 살려, 용병전쟁을 거듭하던 도시국가체제를 넘어 나라 전체가 살 길을 모색한 것이다. 역사의 주도권이 도시국가에서 중앙집권적 대국으로 넘어가는 흐름을 간파한 당대 최고의 전략가였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정을 옹호한 게 아니다. '공화국의 안전과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유능한 정치리더십을 지지했을 뿐이다.

마키아벨리와, 동양적 패도정치의 원형을 제공한 한비자는 여기서 결정적으로 갈라진다. 혼란에 빠진 춘추전국시대를 넘어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의 부국강병책은 거의 한비자로부터 나왔다. 한비자의 법가사상은 엄격한 형벌과 규칙을 강조하는 법(法), 군주의 권모술수를 의미하는 술(術), 뜻을 펼칠 수 있는 세력인 세(勢)로 구성된다. 문제는 그렇게 성취된 안정이 봉건군주 1인만을 위한 가혹한 전제(專制)를 낳는다는 것이다. 2대를 못 넘긴 진나라의 멸망이 그 결과다.

정조의 어찰은 그가 법(法)과 술(術)의 달인이며 세력균형의 대가임을 입증한다. 당쟁을 제어하고 수원 화성을 쌓으며 친위군을 육성하고 국방을 튼튼히 했지만 정조는 진시황과 달랐다. 지역차별 혁파와 민생개혁에 앞장섰던 것이다. 정조는 비록 공화국의 이념을 알지는 못했지만, '나라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 최선을 다한 지도자였다. '백성을 걱정하며 밤새 잠 못 이루는' 위대한 마키아벨리스트였던 것이다.

박정희는 한국현대사 최대의 마키아벨리스트다. 현대사는 박정희와 김일성·김정일 부자(父子)라는 희대의 마키아벨리스트들이 벌인 건곤일척의 싸움인 것이다. 핵게임은 김정일이 벌이는 최후의 술(術)이며, 그 승패는 아직 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에 의하면, "무기를 든 예언자는 모두 성공한 반면, 말뿐인 예언자는 실패했다." 여기서 예언자는 정치지도자를 지칭하며, 무기는 법·술·세를 뜻한다. 그러나 정치인의 가장 중요한 무기는 국민의 마음을 얻어 나라를 지키는 데 있다. 마키아벨리는 결코 지나가버린 추억 속의 인물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