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 위기에 따른 경기 침체로 자동차 업체들이 앞다퉈 '적은 연료로 많이 가는' 고(高)연비 차량을 내놓고 있습니다. 국내 완성차 업체들이 최근 출시한 준중형차의 공인연비는 모두 15㎞/L 안팎입니다. 이는 L당 휘발유 가격 1400원을 기준으로 했을 때 3만원어치 주유로 300㎞ 이상을 갈 수 있는 수치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공인연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국내 소비자는 거의 없습니다. 공인연비는 시내 주행 상황을 상정해 측정하는 연비이지만, 실제로 서울 시내를 달려서 이 같은 연비를 기록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 생산되거나 국내로 수입되는 차는 자동차부품연구원이나 석유품질관리원, 에너지기술연구원 등 에너지관리공단이 지정한 시험기관에서 공인연비를 측정받아야 합니다. 국내 완성차 5개 업체의 경우, 출시가 임박한 상황이라면 자체 연구소에서 측정한 수치를 신고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도 3개월 이내에 지정 기관에서 다시 연비를 측정해 신고한 수치와 3% 이상 차이가 나면 지정 기관 연비만 인정됩니다.
국내 공인연비는 배기가스 측정 방식인 'CVS-75' 모드를 사용합니다. 미국이 사용 중인 이 방식은 측정기 위에 차량을 올린 뒤 정해진 온도와 풍속, 대상 차의 주행거리, 시간 등의 환경에 따라 제자리에서 달리도록 한 뒤 배기가스를 분석해 연비를 산출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때에 적용하는 환경이 국내 도로 여건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CVS-75 모드는 평균시속 34.1㎞에서 달렸을 때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1970년대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내의 교통 상황이지요. 하지만 서울시 교통정보센터에 따르면 지난달 서울시내 전체 도로의 평균속도는 시속 21.8㎞였습니다. 공인연비와 실제연비의 차이가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12일 공인연비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에너지관리공단에 전화를 걸어 "왜 40년 전 미국의 도로 상황을 계속 국내에 적용하고 있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도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공단측이 시속 34.1㎞와 시속 21.8㎞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 한, 공인연비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