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마이너스 통장 대출 만기가 돌아온 한 증권사 임원 김모씨는 K은행에서 '10~30%를 상환해야 한다'는 안내문을 받았다. 5000만원 한도를 거의 쓰고 있어 10%만 상환한다 하더라도 500만원 가까운 돈을 일시에 갚아야 하는 것이다. 김씨는 "번듯한 직장이 있는데 왜 그러냐"'고 따지러 은행을 찾았다.

은행 직원은 "현금서비스를 사용한 기록이 있고, 이자 연체 기록이 있어 신용도가 떨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대신 한도를 유지하려면 금리를 많이 물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김씨는 금리를 무려 연 2%포인트나 더 주기로 하고 마이너스 통장 대출을 연장할 수 있었다. 김씨는 "최근 주변에서 은행이 신용도 평가 기준을 높이면서 마이너스 통장 대출 한도를 줄인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내가 직접 피해자가 될지는 몰랐다"고 말했다.

장모(35)씨는 전세금 1억1000만원을 빼주기 위해 주택담보대출을 받기로 하고 S은행의 한 지점을 찾았다. 지난 11월에 상담했을 때는 시가 3억5000만원의 집을 담보로 잡으면 1억3000만원까진 대출을 받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출 서류를 제출하고 1주일이 다 되도록 은행에서 연락이 없었다. 보통 때는 1주일이 되기 전에 대출 승인이 나왔다.

장씨가 다시 찾아가니 은행 지점 직원은 서랍에서 서류를 꺼내며 "아직 본점에 올리지도 않았다"며 "자세히 계산을 해보니 대출이 9000만원 정도밖에 안되겠다"고 말했다.

장씨는 세입자가 나가는 날에 맞춰 전세금을 빼주기 위해 부족한 2000여만원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뛰어야 했다. 장씨는 “몇 달 전만 해도 돈을 쓰라던 은행이 왜 갑자기 돈을 안 빌려주겠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대출한도 이미 다 찼다. 다음에나 와라”
“금리 인상 싫으면 딴 데 가서 알아봐라”

최근 들어 갑자기 은행들이 대출금을 회수하거나 대출한도를 축소하면서 중산층과 서민들의 하소연이 빗발치고 있다. ‘연말 대출한도가 다 찼으니 내년에 대출 신청을 하라고 한다’ ‘갑자기 신용 대출 한도가 축소되었으니 갚으라고 한다’ ‘금리를 연 1~2%포인트씩 높게 제시하면서 안 되면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한다’….

금융계에 따르면 은행들은 최근 들어 내부적으로 대출을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신한은행은 2008년 12월 중순부터 전 영업점에 1억원 이상의 주택담보대출은 본점 승인을 받도록 했다. 일선 대출 창구에서 1억원이 넘는 신규 대출은 당분간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한은행은 신용 대출의 한도도 크게 낮췄다. 공무원, 정부투자기관 임직원, 교사 등을 대상으로 하는 ‘엘리트론’의 대출한도는 1억원에서 5000만원으로, 의사들을 위한 ‘닥터론’의 대출한도는 2억원에서 1억2000만원으로 내렸다.

하나은행의 경우 개인 신용등급 기준으로 상위 1~7등급에 대해 신용대출을 해줬으나 지금은 7등급에 대한 대출을 중단했다. 상위 1~6등급만 신용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국민은행은 아파트 구입을 위한 중도금 대출 심사를 강화하고 있다. 중도금 대출 금리가 예전엔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에서 0.7~0.8%포인트를 더한 수준이었던 것이 최근엔 CD 금리에 2% 포인트를 더한 수준으로 요구하고 있다.

일선 지점에 대해 대출 영업도 독려하지 않고 있다. 한 은행 지점의 경우 2008년 초 본점에서 할당 받은 연간 지점 대출 목표를 2007년보다 10% 이상 늘려 잡았으나 2008년 6월 이 목표치를 20%가량 줄여 이미 10월에 목표치를 모두 채웠다. 영업점 성과 평가에서도 대출 실적에 가점을 줬지만 이젠 대출 가점은 없애고 연체율을 낮추는 데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지점장들이 대출 영업에 나설 이유가 없다.

대출 목표치 줄이고 연체 집중관리반 신설
“우리부터 살자” 서민·기업 고통엔 눈 감아

반면 연체금 회수는 강화하고 있다. 국민은행은 지난 11월부터 본점 여신관리부 내에 ‘집중관리반’을 신설해 특별관리가 필요한 대출을 집중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새해부터는 영업점 업적 평가에서 연체 대출금 관리 실적에 대한 배점을 높일 예정이다.

우리은행은 개인과 중소기업 대출에 대한 연체 감축 캠페인을 벌이고 있고 하나은행은 14개 가계영업본부에 연체관리 전담반을 파견했다. 신한은행도 각 사업 그룹에 연체 감축을 독려하고 있다.

일선 영업점에서는 아침에 이자나 원금 상환 기일이 돌아온 고객들의 명단을 뽑아 문자 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해 만기일임을 알려주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8년 10월 말 기준으로 은행의 가계 대출 잔액은 385조755억원으로 전달에 비해 1조4000억원이 느는 데 그쳤다. 전년 같은 기간에는 3조9000억원이 증가했다. 증가분이 무려 64%나 줄어든 것이다. 은행의 가계 대출은 올 들어 매월 2조~3조원씩 증가해 왔으나 글로벌 금융 위기의 충격파가 온 10월 이후 은행들이 갑자기 대출을 조이고 있는 것이다.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은 이미 2008년 3분기(7~9월)부터 조이기 시작했다. 중소기업 대출 증가액은 지난 7월 5조5000억원대였지만, 8~9월엔 1조8000억~1조9000억원대로 급감했다. 정부의 대출 독려로 10~11월엔 월 2조6000억원대로 상승했지만 전년 월 평균 증가액(5조4250억원)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 수치다. 아직 가계 대출 연체율은 예년 수준이지만 중소기업 대출 연체율은 2008년 11월 말 현재 1.86%로 1년 전에 비해 0.6%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경기 침체로 돈을 못 갚는 중소기업이 늘어나자 대출을 떼일 것을 두려워하는 은행들이 대출 심사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이 최근 기업 대출, 구조조정 등으로 인해 부실이 발생했을 경우 면책 범위를 늘리겠다고 발표하기는 했지만 일선 영업점에서는 "우선 몸을 사리고 보자"는 태도가 만연하고 있다.

하지만 금융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먼저 직접적으로 정부의 도움을 받은 건 은행들이었다. 정부는 ‘10·19 금융시장 안정화 대책’을 통해 달러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은행들에 300억달러를 직접 공급하고 1000억원의 대외 채무를 지급보증해 주기로 했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각종 대책을 통해 총 550억달러의 외화를 공급할 예정이며, 2008년 12월 12일 현재 367억달러를 공급했다. 2008년 10~11월은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 돈의 씨가 마른 때여서 정부가 적절한 때에 달러를 공급하지 못했다면 은행들이 곤란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뉴욕타임스는 2008년 10월 24일자 ‘금융위기가 신흥시장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기사에서 우리은행을 실명으로 거론하면서 신규 대출을 끌어 오지 못하는 것은 물론 롤오버(대출 만기 연장)를 받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은행의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했다.

은행들은 자신들이 필요할 때는 정부에 손을 벌려 도움을 받은 후에 정작 가계나 중소기업이 도와달라고 할 때는 나 몰라라 눈 감는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펀드 수수료만 챙기고 사후 서비스는 ‘빵점’
서브프라임 사태 때도 펀드 판매에 열 올려

이미 은행은 자신들의 수익만 챙기는 수수료 비즈니스에 몰두하면서 고객의 신뢰를 잃어 가고 있다. ‘신뢰의 위기’를 겪는 것이다. 가계에는 ‘반토막 펀드’를 안겨주고 기업들에는 ‘키코’란 파생 금융 상품을 안겨줘 손해를 입혔다.

은행은 2003년 이후 펀드 판매 영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억 만들기 펀드’ ‘3억 만들기 펀드’ 등이 은행 창구를 통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은행들로서는 예대금리차(2008년 10월 기준 1.48%포인트)가 펀드 판매 수수료(1.35%)보다는 약간 높지만 예금을 받아 대출을 하면 대출 심사 등 번거로운 비용이 들어가므로 손쉽게 창구에서 펀드를 판매해 수수료를 챙겨 수익을 높이겠다고 나선 것이다.

증시가 대세 상승기에 있을 때 펀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포장됐고 실제 고객들이 연 30% 이상의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증시 침체기를 앞두고 원금 손실이 날 수 있는 펀드의 위험성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안 한 채 팔기 시작한 게 문제였다. 게다가 2007년 중반 이후부터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글로벌 금융 시장이 흔들리는 데도 펀드 판매에 집중해 피해를 키웠다. 2007년 한 해 동안 국내외 주식형펀드로 67조원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그중 3분의 1인 23조원이 10~11월 즈음에 집중됐다.

그러나 2008년 들어 글로벌 증시의 급락 사태를 맞으면서 ‘반토막 펀드’가 급증했다. 주가가 40~50% 빠진 때문이다. 2008년 한 해 동안 주식형펀드는 해외주식형 34조원, 국내주식형 29조원 등 약 63조원의 평가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은행이 비난을 받는 것은 제대로 설명도 안 해주고 사후관리도 안 해주면서 ‘밀어내기’식으로 펀드를 팔았다는 것이다. 은행 고객으로선 원금의 1.35%나 수수료로 내면서 제대로 된 서비스를 못 받은 것이다.

최근엔 은행의 펀드 판매를 둘러싼 민원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11월 금융감독원은 펀드를 무책임하게 판매한 우리은행에 투자자 손실액의 50%를 배상하라는 조정안을 내기도 했다. 우리은행이 ‘우리파워인컴펀드’를 판매하면서 원금 손실이 날 수 있다는 걸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수출 중소기업 키코(KIKO) 손실 3조 넘어
“손실 위험 설명도 않고 끼워 팔았다” 소송

은행은 또 수수료 수입을 올리려고 최근 수출 중소기업을 부도 공포로 몰아간 ‘키코(KIKO)’란 파생 금융 상품을 판매했다. 실제로 지난 9월 태산LCD란 우량 중소기업이 키코로 인해 흑자 부도를 내고 기업 회생 절차에 들어갔다.

키코는 ‘녹 인, 녹 아웃(Knock in, Knock out)’의 약자로 약속한 환율 범위 안에서는 환 헤지 효과가 있지만 환율이 올라 약속한 범위를 넘어서면(녹 인 구간) 달러를 2~3배로 물어줘야 하는 파생 금융 상품이다. 복잡해 보이지만 간단히 설명하면 기업이 수출해서 받을 달러를 미리 시장에 팔도록 한 것이다. 때문에 환율이 오르면 수익이 늘어 잔치를 벌여야 할 수출 중소기업들이 이미 달러를 다 팔아 버렸으니 남는 게 없는 장사를 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2~3배를 물어줘야 하니 없는 달러를 시장에서 사서 갚아야 한다.

국내 은행들은 주로 외국계 은행이 만든 키코 상품을 수출 중소기업에 중개해주는 역할을 하면서 ‘세일즈 마진’이란 명목으로 0.2~0.4%의 수수료를 받았다. 키코는 중소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환율이 좁은 범위에서 움직이거나 하락할 때는 이득이지만 올해처럼 급등하는 경우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금융감독원은 2008년 10월 말 환율(달러당 1291원)을 기준으로 키코에 가입한 487개 수출기업의 손실이 3조1874억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들은 “은행이 상품의 위험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고, 대출을 미끼로 강제로 팔기도 했다(꺾기)”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위기의 시대에 은행이 할 역할은 옥석(玉石)을 가려서 돈이 필요한 곳에 돈이 돌게 하는 것이다"라며 "그렇지만 한국의 은행들은 공적 자금이나 좋은 거시 경제 환경에 안주해서 앉아서 돈을 버는 데 익숙하다 보니 무조건적으로 움츠리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 교수는 "위기를 미리 대비했더라면 고객이 어려울 때 도와 장기적인 관계를 형성해 미래에 윈`-`윈(win`-`win)할 수 있을 텐데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은행 혼자 살겠다'는 한심한 상황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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