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반 노래 '사랑은 유리 같은 것'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가수 원준희(39)가 한국에 돌아왔다.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그 당시 스물 하나 꽃다운 나이의 원준희는 갑작스런 결혼발표와 돌연 미국으로 떠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아쉬움과 숱한 소문을 남겼다. 최근 한국으로 돌아온 원준희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그 동안의 미국 생활과 갑작스럽게 한국을 떠나야 했던 심경을 솔직히 털어놨다.
"21살 너무 꽃다운 나이잖아요. 하루 3~4개의 스케줄 때문에 내 생활은 전혀 없었어요. 길거리에서 마음대로 떡볶이도 먹고 싶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었어요. 사생활에 제약을 받으면서 노래를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고민을 많이 해 봤어요. 당시 전 TV에 거의 매일같이 나왔어요.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봤죠. 나를 못 알아보는 곳으로 숨고 싶었어요. 우연히 현미씨의 아들을 알게 됐고, 그가 재미교포란 사실이 흥미로웠어요. 만남을 가진지 3달 뒤 그가 프러포즈를 하더라고요. 처음엔 갈등했죠. 그러나 색다른 생활을 살아보고 싶었어요."
"갑갑한 연예계를 탈출하고 싶었어요."
원준희가 연예계 생활을 접고 미국생활을 결심하기는 정확히 2주가 걸렸다. 그 중심엔 현미씨의 둘째 아들이 있었다. 연예계 활동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앓고 있던 터라 당시 현미씨의 둘째 아들과의 데이트는 원준희에게는 삶의 활력소이자 자유를 향하는 길목과도 같았다. 결국 원준희는 연예계의 부와 명예를 모두 버린 채 사랑의 끈에 이끌려 현미씨의 둘째 아들과 함께 미국 LA로 떠난다.
"제가 갑자기 결혼을 발표하고 미국으로 떠난다니까 많은 소문들이 돌더라고요. 한국을 떠난 진짜이유요? 아이들 스타란 신분 때문에 모든 것이 구속된 나의 삶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 하루하루 버티기가 너무 힘이 들었죠. 그 때 만난 나의 신랑은 구세주나 다름없었어요. 그에게 푹 빠지게 됐고, 정말 사랑이란 것에 내 모든 것을 맡기게 된 거에요. 미국으로 떠난 뒤 6개월 동안은 미치도록 즐거웠어요. 마음껏 돌아다니고 생활이 굉장히 편했죠. 그런데 6개월이 지나니까 슬슬 노래를 부르고 싶고, 무대도 그리운 거예요. TV를 봤더니 미칠 것 같았어요. 그래서 TV를 약 2년 동안 멀리했죠. TV를 보고 있으면 일을 하고 싶을까 봐서였죠."
"모든 것이 새로워..."
청춘의 꽃이 채 피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선택한 결혼. 원준희는 자유와 사랑을 얻었지만, 그 뒤에 극복해야 할 숙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난생 처음 겪게 된 미국생활은 물론 방송 활동을 비롯해 한국 생활의 향수를 하루빨리 잊어야 했다. 우선 언어소통이 힘들었던 그는 열심히 집 밖을 돌아다니며 현지 사람들과 만나 생활영어를 익혀나갔다. 남편의 능숙한 영어실력 때문에 생활하기는 크게 어려운 점은 없었지만, 스스로 미국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가까운 동네 주변부터 서성이며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했다. 방송생활을 잊기 위해 미국 정착 4년 만에 미국의 유명 패션학교에 입학, 패션공부도 시작했다. 항상 그의 주변에는 패션관련 서적이 함께 했다.
"미국생활의 처음이자 마지막 위기를 맛봤다."
패션학교 입학 1년 만인 지난 1994년에 원준희에게 어지러움과 하혈 등 신체이상이 나타났다. 바로 임신이었다. 조심스럽게 몸조리를 한 끝에 원준희는 8개월 만에 첫 딸을 얻게 되며 '어머니'가 된다. 그러나 첫 아이 출산 이후 또 한번 찾아온 우울증. 원준희는 그 때를 회상하며 "한국을 그리워하는 향수와 첫 아이 임신 당시 포기해야했던 패션공부에 대한 여운이 더해져 약간은 신경이 예민해진 시기였다"고 설명했다. 특히 남편의 새 사업 준비로 인해 주변 상황이 어지럽다 보니 날이 갈수록 부부싸움의 횟수는 늘어갔고, 이로 발생된 마음의 상처는 커져만 갔다.
"너무 화가 나서 한국에도 나갔다 와보기도 했어요. 앞으로 '패션공부를 다시할까', '노래를 다시 부를까' 란 고민에 빠지기도 하고요. 그러다 생각한 것이 ‘아이나 하나 더 갖자’ 였어요. 혼자 커가는 첫째도 안쓰러워보였고, 남편과 자꾸 사이가 나빠지니까 뭔가 극복을 해야지 안 그러면 이혼할 것 같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둘째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마음의 여유를 찾아가기 시작했어요."
"제 남편이 총에 맞았어요. 다시 한번 사랑을 확인했죠."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둘 째 아이를 임신했지만 우울증은 좀처럼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러던 중 결정적인 한 사건이 원준희의 마음 깊은 곳에 애틋한 가족애를 깨닫게 만들었다. 바로 강도사건이다. 인터뷰 내내 환환 웃음을 잃지 않았던 원준희는 다소 긴장하는 모습으로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2000년 가을쯤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였어요. 하루는 집에 강도가 들었는데, 남편이 강도의 총에 맞아 위험한 고비를 넘긴 일이 있었어요. 그 땐 미국에선 한국의 유명가수의 둘째 아들이 총에 맞았다는 뉴스까지 나올 정도로 화제였어요. 굉장히 놀랬죠. 3일은 식음을 전폐했어요. 밥이 안 넘어 가더라고요. 난 그때 사람이 놀라면 물도 안 넘어 간다는 소리를 진짜 느꼈어요. 남편이 입원해 있는 동안 곁에서 간호를 하면서 '내가 정말 이 사람을 사랑하나보다'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때 또 한번 남편을 의지하고 인생에 묻어가는 분위기가 됐던 것 같아요."
"행복해요."
"강도사건 이후 우울증은 없었던 것 같아요. 무기력해질 때면 가장 행복한 순간을 떠올렸어요. 무엇인가 목표를 정해놓고 바쁘게 그리고 열심히 살아가다보니 우울증이 없어졌어요." 원준희는 이후 2004년에 셋째 아이를 출산했다. 첫째와 둘째 손녀도 물론 예뻤지만 셋째 아이는 시어머니 현미씨가 너무나 기다리던 손자였기에 그 의미가 남달랐다고 했다. "시어머니와 남편이 무척 좋아하시더라고요. 어느새 아이들 아빠의 어깨가 쫙 펴져 있는 것을 보면서 나도 기뻤어요."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