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에서 돼지 1500마리를 키우는 안훈진(35)씨는 지난해 휴일도 없이 일했다. 하지만 연말 장부를 계산해 보니 빚만 1억원 늘어 있었다. 사료값은 급등하는데 돼지고기 가격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주변 돼지 농장들이 많이 사라졌죠. 지금도 다들 간신히 버티고 있습니다." 양돈을 시작한 뒤 안씨는 매일 오전 7시에 농장에 나와 오후 7시까지 쉬지 않고 일하지만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고된 안씨의 일과에는 최근 새로운 일이 추가됐다. 컴퓨터 모니터에 온라인 주식 거래 프로그램과 비슷한 '선물(先物·키워드) 거래 프로그램'을 띄우는 일이다.

안씨는 지난 7월 돈육 선물 시장이 문을 열었을 때부터 거래에 뛰어 들었다. "거래는 가끔씩 해요. 농장 일도 많은데 전업 투자자들이 하는 것처럼 매일 들여다 볼 수는 없죠. 그래도 가격은 매일 체크합니다."

지난 8월, 그는 9월에 만기가 되는 돈육 선물 1만㎏(10거래)을 1㎏당 4500원에 매도하는 계약을 했다. "돼지고기와 경쟁관계인 미국산 쇠고기가 시장에 풀려가는데 돼지값은 너무 올라 곧 내릴 거라고 예상했죠." 만기 전날이 되자 선물 가격은 3900원대까지 내려갔다. 이 거래로 안씨는 500만원을 벌었다. 그가 농장에서 기르는 진짜(현물) 돼지 가격은 1㎏당 4800원에서 4000원대 아래로 떨어졌지만 선물 거래를 통해 위험 관리를 한 덕에 손해가 상쇄된 셈이다.

금융 배우는 농민들

전세계가 금융 부문의 불확실성에 휘청거리고 있지만 우리 농촌에는 금융을 '지지대'로 이용하려는 농민이 늘고 있다. 돈육 선물처럼 농산물 파생상품을 이용해 '위험 관리'를 하려는 이들은 인터넷 카페를 만들고, 연구회를 조직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비용이 크고 투기 수단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지난 7월 21일 문을 연 돈육 선물에 대해, NH투자선물 돈육선물팀 김인수 팀장은 "농민들 입장에서 선물 거래의 핵심은 가격이 떨어질 때를 대비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원리는 이렇다. 10월 현재 내년 2월 출하를 목표로 돼지를 키우는 농민이 있다고 가정하자. 지금 돼지 값은 1㎏에 4000원이지만 출하할 때쯤에는 가격이 떨어질 것 같다고 예상했다면 돈육선물 시장에서 내년 2월 만기 선물을 4000원에 파는 계약을 체결한다. 2월이 되자 돼지 값이 ㎏당 2000원까지 떨어졌고 이 농민이 돼지를 출하했을 때는 예상보다 2000원의 손해를 본다. 하지만 선물시장에서는 4000원에 팔기로 한 만큼 2000원 이익을 보게 돼 손실을 덜 수 있다. 현물과 선물거래는 서로 한 쪽이 수익이 나면 다른 쪽은 손해가 나는 관계이기 때문에 대표적인 '위험회피'(헤지·hedge) 수단이다.

김 팀장은 "다른 나라의 연구를 보면 대체적으로 선물 시장이 활성화되면 가격 변동폭이 줄어들고 선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도 선물 가격을 보며 생산량을 조절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 등 농산물 금융 시장 발달

현재 미국 시카고 상업거래소에서는 선물로 거래되는 농산품은 쇠고기·생 돼지고기·얼린 돼지고기·콩·밀·새우·오렌지주스 등 50여종에 이른다. 캐나다·유럽연합 등도 선물·옵션·농산물 보험 등 농업 관련 금융이 다양하게 발달해 있다. 미국의 경우 농산품 파생상품 거래자의 10%가 농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부의 가격 지원 정책에 익숙한 우리 농촌에서는 금융을 통한 위험 관리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대한양돈협회 정종극 부회장은 "주식에서도 개미투자자들만 손해를 보는 것처럼 정보가 없는 양돈 농가들이 위험성이 높은 선물 시장에 뛰어드는 것은 구명조끼도 없이 큰 바다에 뛰어든 격"이라며 "회원들에게도 위험성을 미리 알리고 있다"고 말했다. 개장한 지 두 달이 지난 현재 돈육 선물 시장의 하루 평균 거래량은 120건에 머물고 있다. 당초 한국증권선물거래소는 일 1000건 계약을 목표로 했었다.

충북대 농업경제학과 윤병삼 교수는 "정확한 지식만 있다면 선물 거래는 농민들이 가격 폭락에 대비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라며 "하지만 파생상품은 투기로 흐를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인 만큼 농민들에게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현재 참여하는 데 진입장벽이 되고 있는 거래 기본 예탁금(1500만원)을 낮추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물(先物) 

장래의 일정 시점에 특정 대상물을 계약 체결시에 정한 가격(선물가격)으로 인도, 인수할 것을 약속하는 계약. 돈과 물건을 그 자리에서 맞바꾸는 현물거래에 대응되는 개념이다. 돼지선물의 경우 축산물등급판정소가 공시하는 '돈육 대표가격'을 거래한다. '밭떼기'로 상징되는 선도거래와 달리 한국증권선물거래소가 결제이행을 보증한다. 선물과 함께 대표적인 금융상품인 옵션(option)은 정해진 기간 안에 주식, 통화, 귀금속, 곡물 등을 약속된 가격으로 매매하는 권리를 거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