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중앙대 국악관현악과(피리 전공)에 합격한 이두현(30·사진)씨는 '국악에 미쳐' 지금껏 지극히 평탄했고 '범생이'에 가까웠던 삶의 괘도를 한꺼번에 수정했다. 어찌 보면, 대학시절 풍물패의 '어깻죽지 장단'에 매료된 것이 화근이었는지도 모른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밤새는 줄 모르듯, 늦은 나이에 피리의 세계에 빠져든 그를 누구도 뜯어말릴 수 없었다. 대기업 직장마저 그만두고 피리 소리에 목말라하며 하루 종일 이어지는 연습을 이겨내고 재수 끝에 중앙대에 입학했다.

이구희 객원기자

학창시절엔 음악과목 싫어해

이씨는 1993년 광주과학고를 조기졸업한 뒤 카이스트 산업공학과(인간공학 전공)에 진학,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어린 시절, 과학자와 같은 구체적인 형태의 꿈을 꾸진 않았다고 한다. "과학자라기보다 제가 취득한 지식과 방법론을 타인과 나누고, 그 속에서 보람을 느끼고 싶었다"고 했다.

카이스트 시절, 풍물패 동아리인 '소리모음'에 가입하면서 국악과 연(緣)을 맺었다. 그러나 그 '연'은 질기고 억셌다. 대학원 진학을 위해 1년간 공부에만 매달린 것 외에 풍물패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국악에 미친 것이다. 그는 "초등에서 고등학교까지 음악시간을 싫어했다"며 "생소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음악 이론을 외우라고 강요하고 장단과 소리의 원리를 속 시원히 설명해 줄 선생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노래를 좋아했다. 자신이 노래할 때 몸에서 느껴지는 좋은 느낌과 귀에서 들리는 화음이 좋았다는 것이다. 이씨는 "대학 때 풍물을 하게 되면서 국악이 무엇인지, 어떤 화음을 지니는지 알게 됐고, 이전의 선입관에서 조금씩 벗어나 음악 자체를 즐기게 됐다"고 회고했다.

대기업 취업 후 음악의 길로

지난 2003년 카이스트 대학원을 졸업한 뒤 그해 3월 LG필립스 LCD생산관리 부서에 입사했다. "좋은 동기들과 팀원들을 만나 즐겁게 생활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악과 피리에 더욱 심취하게 되면서 자신의 미래에 고민하게 됐고 결국 퇴직을 결심했다. 2005년 7월 잘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그의 결심에는 공주 '충남연정국악원' 피리수석 연주자인 조성환 선생이 영향을 미쳤다. 이씨는 "대학 풍물패 때 독학으로 익히던 태평소를 직장 생활을 하면서 조 선생님께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며 "제가 알고 있거나 짐작했던 음악인, 특히 국악인에 대한 비판적인 선입견을 깨뜨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국악을 전공하겠다고 말했을 때 은사는 "음악이 '업' 될 때는 음악이 마냥 순수할 수 없다"고 만류했다. 그러나 완강한 제자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고 대입을 준비하는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오랜 준비기간과 합격

회사를 그만 둔 뒤 대전에서 1년간 지내다 2006년 9월 서울로 올라와 대입 준비에 전념했다. 국립국악원 정악단 악장이던 이영 선생을 만나 피리를 본격적으로 배우게 됐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국악을 접하고 매일 악기를 불던 학생들과 대입 경쟁을 해야 했기에 그들에 비해 실력 차가 너무 컸다. 결국 2007년도 입시에 낙방하고 만다.

"늦은 나이에 악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음악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몸이 잘 따라 주지 못했다"며 "하지만 대학 입학을 위해서는 당연히 남들보다 열심히 해야 했고 배움에 목말라 있었기에 하루 종일 이어지는 연습이 즐겁고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이씨의 형이 물심양면 격려했다. 형의 집에 기거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덕에 두 번째 대입 도전에 성공, 올해 국악과 새내기가 됐다.

"지난 10년간 대학에서 배웠던 공부가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생각지 않아요. 오히려 산업공학과 인간공학을 전공하면서 체득했던 전문성, 방법론, 분석적 사고력 등은 악기연습은 물론이고 새로운 한국음악의 모습을 탐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이 부분이 제가 다른 국악 전공자들보다 강점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