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경기도 용인의 드라마 '이산' 촬영 세트장. 오전 10시쯤 2.5t짜리 트럭 한 대가 촬영장에 도착했다. 40대 남자가 차에서 뛰어내리더니 곧장 차 옆구리를 열었다. 짐칸 속에서 층층이 쌓인 배식(配食)도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동식 식탁 30개, 의자 150개, 식판(食板) 1200장, 플라스틱 접시 600개, 수저 1200벌, 대형 국통 2개, 중형 국통 3개, 튀김 솥 2개, 대형 플라스틱 대야 2개, 음식 재료를 섞는 사발 3개, 플라스틱 채 2개, 반찬 8종류를 한꺼번에 나눠줄 수 있는 배식대, 배식용 스테인리스통 10개…. 마술을 부리듯 큰 국통 속에서 작은 국통이 나오고 그 안에는 다시 국자와 주걱이 가득했다. 모두 1200명을 급식할 수 있는 도구다.
남자가 도구를 들어내자, 차 속에서 주방이 드러났다. 가로 4m× 세로 2m 크기의 트럭 속에는 전기밥솥 3칸, 가스레인지 5개, 대형 화덕 2개, 보온 통 1개, 530L 크기 냉장고가 촘촘히 박혀있다. 작은 식당의 부엌이 그대로 2.5t 트럭에 실려온 것이다. 이 트럭이 '이산' 촬영장 가족들을 사흘간 먹여 살릴 '밥차(車)'다.
오후 2시, '밥차' 근처에서 한바탕 전쟁이 벌어졌다. 정오에 두 팀으로 나눠서 내려오기로 했던 촬영팀 80여 명이 한꺼번에 몰려왔기 때문이다. 컨테이너 가건물 식당 밖으로 점퍼를 입은 스태프들과 조선 시대 복장을 한 출연자들이 뒤섞여 길게 줄을 섰다.
"사장님 고등어가 떨어졌어요." "여기 밥 좀 더 달라니깐…." "국 더 없어요?"
늦은 점심인 까닭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 사람들은 곳곳에서 소리를 쳐댔다. 먹고살기 위한 전쟁이 따로 없었다.
현장 인원을 담당하는 김종학 프로덕션 장병태 PD는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으면 그게 신기한 일"이라며 "군것질을 할 수도, 다른 음식을 사 먹을 수도 없는 촬영 현장에서 밥차는 군대에 있을 때 '황금마차(이동 PX)'같은 존재"라고 했다.
◆밥차는 1990년대 말 등장
작년 10월 열린 제1회 서울 충무로 국제영화제에서도 밥차는 당당히 한국 영화의 주인공 중 하나로 대접받았다. 팬들에게 촬영 현장 분위기를 전달해주기 위해 충무로 영화의 거리에 등장한 것이다.
밥차는 1분 1초라도 아끼려는 영화 제작 현실이 만들어낸 업종이다. 수십 명, 수백 명이 함께 움직이는 영화에서 식사하러 오가는 시간이 경제적으로 큰 손실이다. 샌드위치나 햄버거에 익숙한 외국인들이야 괜찮지만, 국과 밥이 필수적인 한국인들에게 야외에서 '집에서 먹는 밥맛'을 내는 밥차는 효과적인 '틈새시장'이 됐다.
밥차가 촬영장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90년 무렵. 처음 등장한 밥차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자기가 운용하는 밥차에 대한 실용신안 등록을 갖고 있다는 '사이참'의 김창국(48) 사장은 "1998년쯤부터 밥차를 시작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식으로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영화계 사람들은 밥차가 2000년 이후 한국 영화가 급성장하면서 촬영장의 필수요소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현재 전국에서 촬영장을 누비는 밥차는 30여 대 정도로 추산된다. 기획사인 싸이더스 HQ의 이성준 팀장은 "대부분 밥차는 부부나 가족 단위로 운영하는 자영업 형태이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긴 어렵다"며 "영화 제작이 한참 많을 때는 40대가 넘을 때도 있었지만, 영화계가 다소 위축되면서 다른 업종으로 빠져나간 사람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밥차 업체 중에서 가장 큰 곳은 10대 정도를 운영한다. 다른 곳은 대부분 개인이 운영한다. 한 이름을 사용하더라도 대표가 일을 따와서 다른 차들에게 나눠주는 '밥차 연합' 같은 형태가 흔하다. 좋게 얘기하면 영국의 로이드 재보험 같은 구조지만, 영세한 산업인 셈이다. 사이참의 김 사장은 "촬영장 일은 시작했으니까 사람을 보고 하는 거지, 돈만 보자면 경로잔치나 체육대회를 하는 쪽이 훨씬 많이 남는다"고 말했다.
◆밥차의 메뉴
촬영장의 한 끼는 1식6찬이 기본이다. 보통 '밥과 국, 김치 튀김 조림 무침 그 외 추가 메뉴 1개'로 구성된다. 20㎏짜리 쌀 1포대가 보통 100~120명분의 밥으로 나간다. 보통 식당의 한 끼보다 훨씬 밥을 많이 주는 편이다. 야식으로는 라면, 우동, 누룽지, 떡볶이, 주먹밥, 김밥이 인기다.
'전주 밥차'를 운영하는 채수영(39)씨는 "영화 촬영은 길게 보면 3개월 정도 객지를 떠돌게 되는 일이기 때문에 집에서 먹는 것 같은 맛을 내는 게 중요하다"며 "좋아하는 음식은 개인차가 있지만, 피하는 음식은 하는 일에 따라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카메라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손에 기름이 묻는 것을 꺼린다. 외진 촬영장에서 손을 닦을 겨를이 없을 때는 더욱 그렇다. 분위기를 잡는 멜로 영화 촬영장에서는 냄새가 많이 나는 음식도 금물이다. 배우의 감정 몰입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분장을 한 채로 먹는 사극 배우들은 몸이나 옷에 음식이 묻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복잡한 분장을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촬영장 밥차에서는 어떤 음식을 만들까? '수랏상'의 정자영씨는 "촬영장에서 원하는 음식은 뭐든지 한다"며 "하루 전에만 말해주면 프랑스 음식 말고는 뭐든지 만들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 밥차는 보통 한 끼에 수십 명이 함께 먹을 수 있는 분량으로 만든다.
하지만 특별한 사람만을 위해 조금씩 만드는 특별한 메뉴가 있다. 미역국이다. 그의 밥차에는 항상 미역이 실려있다. 그는 영화 촬영에 참여하는 배우나 스태프들의 생일을 확인해 놓는다. 그는 "객지 나와서 고생하는데 생일날 미역국 한 그릇 못 먹으면 얼마나 서럽겠냐"고 말했다.
정씨가 자주 준비하는 별식은 누룽지 케이크. 얇게 눌어붙은 누룽지를 달짝지근하게 만들어 쌓은 것이다. 영화 'M'을 찍을 때 군것질 버릇이 든 이명세 감독을 위해 만들어주던 것이 밥차의 히트 상품이 됐다.
촬영장 사람들은 모두가 밥차의 밥을 먹을까. 영화와 드라마 사이에 차이가 있다. 영화 촬영장은 대부분 영화사에서 스태프 전체의 식대를 낸다. 그래서 다 함께 식사를 한다. 톱스타건, 조명 보조건 간에 구분이 없다.
드라마 촬영 현장은 보통 각자 돈을 내고 먹도록 한다. 식사는 한끼에 5000원 정도고, 야식은 2000원 정도 한다. 그래서 돈이 부족한 보조 출연자들은 "밥차가 비싸다"며 미리 싸온 도시락이나 빵을 먹는 일도 있다고 한다.
드라마 촬영장에는 밥차의 밥을 거의 안 먹는 사람들도 있다. 무대와 소품을 담당하는 미술팀이다. 그들은 대부분 스스로 만들어 먹는다. 장병태 PD는 "미술팀 멤버들은 기본적으로 손재주가 뛰어난 데다가 극에 나오는 요리를 만드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주로 요리 재료 다 가지고 와서 만들어 먹는다"고 말했다.
밥차 업체들은 요즘 영화 촬영 횟수가 줄어들어 울상이다. 영화만 전담하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운동회 같은 행사를 뛰는 실정이다. 거의 영화 촬영장만 쫓아다니는 정씨는 지난 3월에는 거의 일이 없어서 놀았다. "스크린쿼터 축소의 직격탄을 맞고, 유가 상승의 유탄을 맞고, 식료품 가격 상승에 관통상을 입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처음 밥차를 시작한 8년 전 한 통에 9000원 하던 가스가 지금은 3만5000원이 됐어요. 기름 값은 말도 못하지요. 그런데 밥 값은 지금도 그대로 5000원입니다. 다른 식당들은 척척 값을 올리지만, 요즘 영화판에 돈 잘 안 굴러가는 거 다 아는 마당에 야박하게 올려달라고 할 수도 없는 처지입니다."
◆영화 장면보다 기억에 남는 한 끼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연인원 2만5000명을 동원해 한국 영화 최다 단역 동원 기록을 세운 영화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전투 장면은 강원도 대관령 목장 중턱에서 한겨울에 찍었다. 정씨는 "그때 만든 김치볶음밥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날은 춥고, 사람들이 따뜻하게 몸을 녹일 데도 없어 뭘 만들지 고민했다"며 "고민 끝에 볶음밥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이런 고민 덕인지 그의 '수랏상'은 임권택 감독의 '간택'을 받았다. 2004년 '하류인생'을 찍은 이후로 임 감독은 촬영이 있을 때마다 정씨에게 식사를 맡긴다고 한다. 요즘도 영화계 안에서 그의 밥차는 '임권택 감독의 밥차'로 유명하다.
전주밥차를 운영하는 채씨는 원래 광고, 홍보 영상물을 찍던 프로덕션 기획자 출신이다. 그는 "현장에서 늘 시간에 쫓기면서 김밥이나 햄버거로 때웠다"면서 "촬영 현장을 관심 있게 보고, 그 흐름을 파악하지 않으면 밥차는 성공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가장 보람 있는 순간은 영화 끝의 스태프 롤을 볼 때다. '케이터링 : 전주밥차'란 한 줄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고 한다.
전주밥차는 해외에도 다녀왔다. 2005년 개봉한 영화 '천군'의 촬영을 따라 중국에 다녀온 곳이다. 그는 "이제 해외에서도 한국 사람들 입맛에 꼭 맞는 밥을 만드는 법을 알고 있다"며 "해외 촬영 때도 불러만 달라"고 말했다.
사이참의 조리사 윤용희(46)씨는 "촬영장 상황에 따라 음식의 간을 맞추는 법도 바꾼다"며 "날이 추울 때는 몸이 더워지라고 국을 좀 얼큰하게 하고, 날이 더울 때는 땀이 많이 나니까 짭짤하게 한다"고 말했다. 윤씨는 추운 날은 국에 마늘은 좀 더 넣으면 연기자들이 힘을 내는 것 같다고 했다.
드라마 '이산' 촬영장에서 만난 보조 출연자 김모(48)씨는 절대적인 밥차 지지자였다. 그는 "사극 촬영장은 대부분 산 중턱에 있어서 춥다. 그래서 밥과 국이 식은 건 절대 참을 수 없다"며 "뜨거운 밥 먹고 찍은 장면이랑 찬 도시락 먹고 찍은 장면은 모니터링 해보면 박력에서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