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오후 6시 서울 서초동 국제복싱체육관 안에 있는 사각의 링 위. 두 남녀가 엉겨 붙어 프로레슬링 연습이 한창이었다. 170㎝ 키에 늘씬한 몸매의 여성 레슬러가 상대방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갑자기 달려들어 성큼 뛰어올랐다. 두 다리로 상대의 목을 감고 올라탄 여성은 '획' 옆으로 몸을 날리며 하체를 비틀었다.

버티지 못한 남성 레슬러는 "억!" 소리를 지르며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그대로 파란색 링 바닥에 "꽈당"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그 순간 옆에서 샌드백을 두드리고 있던 10여 명이 잠시 멈추고 "와~" 감탄사를 내뱉었다.

여성 레슬러는 경기도 화성에 있는 한 중소의류업체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이수현(26)씨다. 이씨는 "상대 머리를 감아 조르거나 팔과 다리를 꺾어 '꽈당' 소리가 날 정도로 메어치면,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서초동 국제복싱체육관에서 프로레슬링 기술을 연마 중인 이수현씨가 남자 레슬러의 팔을 꺾는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링 위에선 내가 왕(王)"

'쇼'와 '반칙'이 가미된 프로레슬링을 배우는 샐러리맨들이 늘고 있다. 동국대학교 사회교육원 스포테인먼트(Sportainment·Sport + En tertainment·스포츠와 오락의 합성어)과가 지난달 29일 가진 '프로레슬러 양성과정' 입학설명회엔 20명 모집 정원의 6배가 넘는 128명이 지원서를 냈다. 그들 중 60명이 직장인이었다. 유명 외국계 화장품업체 직원, 시중은행 중간간부, 대형마트 직원 등 다양했다.

스포테인먼트과 장태호 교수는 "이들이 밝힌 지원 동기는 대부분 비슷했다"며 "프로레슬링을 즐기며 현실 속의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고 싶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대한프로레슬링협회에 등록돼 있는 프로레슬링 선수는 40명. 그러나 최근 5년 사이 한 차례라도 경기를 해본 선수는 13명에 불과하다. 사실상 한국 프로레슬링은 고사(枯死)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저변을 살펴보면 상황은 다르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등록된 프로레슬링 동호회 수는 약 1만2000개, 회원으로 가입한 사람은 380만명이 넘는다.

이마트에서 물류관리를 하고 있는 배동민(26)씨는 퇴근과 동시에 옷을 갈아입고 집 근처 헬스장으로 간다. 프로레슬링만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체육관이 없어 헬스장에서 발목 꺾기, 목 조르기와 같은 기초적인 프로레슬링 기술들을 연마하고 있다.

배씨가 프로레슬링에 입문한 것은 2006년 공인중개사 시험에 2년 연속 낙방하고 좌절감에 빠져 있을 때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프로레슬링 동영상을 보고 큰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때부터 배씨는 미국 프로레슬링협회에까지 이메일을 보내 기술자문을 하며 개인훈련을 시작했다. 배씨는 "프로레슬링을 연습하면서 많은 자신감을 얻었다"며 "기회가 되면 아예 전문 선수로 활동하기 위해 유학을 갈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2006년 2월 경기도 광명시에서 열렸던 프로레슬링대회에서 데뷔무대를 가진 윤강철(34)씨는 주중엔 퀵서비스 배달원, 주말엔 이삿짐센터 직원으로 일한다. 업무 중에 손아래로 보이는 사람들로부터도 걸핏하면 "야, 이거 비싼 거니깐 조심해" "퀵이 왜 이리 늦게 와"라는 핀잔을 듣는다고 한다. 항상 작은 오토바이 위에 앉아서 배달을 해야 하는 일상도 윤씨를 더욱 갑갑하게 한단다.

윤씨는 "링 위에 올라 포효하듯 고함을 지르고 상대를 내던지고 하면 나도 모르고 있던 카리스마가 솟구쳐 오르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악역(惡役) 레슬러가 좋다"

태권도나 검도, 유도와 같은 격투기는 모두 '도(道)'다. 규칙을 지키고 정정당당함을 강조한다. 프로레슬링은 다르다. 반칙도 기술이다. 각 선수의 역할도 따로 있다.

미국 프로레슬링 단체 WWE에 소속된 80여 명의 선수들은 각본에 따라 선(善)과 악(惡)의 역할을 맡아 링 안팎에서 스토리를 이어간다. 눈물 어린 우정을 보여주다가도 어느 샌가 뒤통수를 치는 원수 사이가 된다. 관객들은 이런 모습에 재미를 느낀다.

동국대 사회교육원의 '프로레슬러 양성과정'에 지원한 윤모(36)씨. 그는 시중은행 총무파트에서 팀장이다. 안정된 직장과 가정을 가진 '전형적인 7년 차 봉급쟁이'다. 마르고 왜소한 체구에 동그란 금테 안경을 낀 그는 "일상의 모습과 정반대인 극악무도한 악역(惡役) 프로레슬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치열한 내부경쟁과, 뒤에서 평가당하는 직장생활의 스트레스를 풀려고 작년에 복싱을 배워 봤지만 두 달 만에 그만뒀다고 한다. 링 위에서도 지켜야 하는 규칙이 꼭 '사내규정(社內規定)'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윤씨는 "착하게 살 수밖에 없는 직장인들의 스트레스를 악당 레슬러가 돼 풀고 싶다"고 말했다.

원광대학교 정현욱 교수(사회심리학)는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새로운 자극을 원하기 마련"이라며 "적절한 일탈행위는 현대인들의 사회를 보는 시야를 '확' 틔워 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