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파키스탄 무슬림들과 전투복을 입은 미군들이 한 길가에서 마주치는 곳, 세계 여러 나라의 음식문화가 공존하는 곳. 용산구 이태원은 서울 '지구촌 거리'의 원조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외국인들의 쇼핑 명소로 이름 날렸고, 1997년에는 서울 최초의 관광특구로 지정됐다. 최근에는 서초동 서래마을, 연희동 차이나타운 등과 더불어 서울시로부터 글로벌 빌리지로 선정됐다. 20년이 넘는 동안 이태원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상권이 침체하면서 쇼핑·유흥명소라는 명성이 예전보다는 좀 덜 해졌지만, 골목과 골목 사이로 인종과 문화와 국적이 갈라지고 뒤섞이면서 진정한 세계 문화의 용광로로 바뀌어가고 있다.

◆제3세계인들이 주름잡은 이태원1동

그 동안 이태원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이 동네 터줏대감들이 '미군'에서 '제3세계인'으로 급속히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경기침체로 상권이 전반적으로 위축된 데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군들 외출이 엄격히 제한됐기 때문이다. 용산기지 이전방침이 확정된 후 이곳 상권을 좌지우지하던 미군들은 눈에 띄게 줄어드는 추세다. 외국인 상대 업소가 많았던 이태원 1동에는 우즈베키스탄·방글라데시·몽골·필리핀 등 외국인 노동자와 나이지리아·가나 등에서 온 상인들이 부쩍 늘었다. 미군들을 상대로 영업하던 주요 업소와 클럽들은 상당수가 이들의 식료품점·휴대전화 대리점 등으로 바뀌었다. 특히 보광초등학교에서 이슬람성원을 지나 제일기획 뒤편까지 이어지는 거리에는 이슬람식으로 도축된 고기를 취급하는 식료품점과 크고 작은 레스토랑이 늘어서 있다. 이슬람 종교전문 서점까지 새로 들어서 이국적 풍경이 물씬 풍긴다. 이태원에서 태어나 살았다는 임학성(56)씨는 "유흥업소 위주 상권이 붕괴되면서 업주들이 다들 생계를 찾아 이주해 이제 아는 이웃이 거의 없다"며 "주변이 뉴타운으로 재개발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한국인들은 이곳에 더 이상 둥지를 틀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용산구가 유럽풍 테마거리로 꾸미기로 한 이태원로의 가상사진.

◆아프리카 동네로 변하고 있는 이태원2동

전형적인 주거중심지역인 이태원 2동은 '아프리칸 빌리지'로 꾸며지고 있다. 1980년대 무렵까지 미군들이 대거 영외 거주지를 마련했었고, 2000년대 들어 미군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주거층은 국제학교 교사들이나 클럽에 일하러 온 동남아시아와 러시아 무용수들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들이 생활환경이 좀 더 편한 지역으로 빠져나가면서 3~4년 전부터는 나이지리아, 가나 등에서 온 아프리카인들이 크게 늘어났다. 이들은 이주노동자부터 소규모 보따리 무역상, 외국어 강사 등 직업도 다양하다.

아프리카인들은 원래 이태원 북쪽 해방촌에 많이 살았지만, 점차 이태원로 쪽으로 내려오고 있다. 나이지리아인들의 경우 지하 건물을 빌려 자신들만의 교회를 꾸렸고, 예배는 물론 물물교환 장소로 이용하기도 한다.

◆이태원로에 유럽 테마거리 조성

이태원로 해밀턴 호텔 뒤편을 비롯해 반포로와 경리단길로 이어지는 길은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외국음식점 거리다. 파키스탄 탄두리 치킨, 터키 케밥, 중남미 타코, 그리고 두툼한 패티가 얹힌 수제 햄버거 등 쉽게 맛볼 수 없는 요리를 즐길 수 있어 미식가들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용산구는 이 같은 이태원로 일대에 유럽 분위기 테마거리를 만들기로 했다. 녹사평역 인근 이태원로 입구에서 해밀턴 호텔까지 구간에 네덜란드 거리, 이탈리아 거리(앤티크 소품), 프랑스 거리(의류), 스페인 거리(축제), 스위스 거리(금융·상업) 등을 올해부터 꾸며갈 계획이다. 이와 함께 이태원로 구간별로 소규모 의류·가죽·잡화 등 관광상품 판매기능은 유지하면서 이면도로에는 외국물품 벼룩시장 거리, 중저가 외국인 숙박 및 주거시설, 외국음식 거리 등을 조성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