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문명은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휴머니즘을 발견하려는 인간의 노력 여부에 달려 있다.”
지난달 19일 독일 에센 문명연구소(KWI·Kulturwissenschaftliches Institut)에서 만난 요른 뤼젠(70·Joern Ruesen) 연구소장은 “지금 지구는 갈등과 반목에 있다. 열쇠는 인간이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기 때문에 종교·지역·국가·종족의 차이를 뛰어넘는 ‘타협할 수 없는 것의 타협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에센 문명연구소는 1998년 공산주의가 최종적으로 몰락한 이후, 다가올 새로운 문명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됐다. 보쿰대, 도르트문트대, 에센-두이스부르크대 등 3개 대학이 연합해 설립했지만, 연구재원은 모두 독일 정부에서 지원을 받는다. 1920년대 세워진 3층짜리 전기회사 건물을 개조해 연구실과 콘퍼런스룸, 방문 연구자들의 숙소를 마련했다. 지금은 중국·일본·인도·남아공·멕시코 등 여러 나라의 학자들과 함께 ‘문명 간 협력하는 인류’ ‘유럽 휴머니즘 비판’ ‘휴머니즘과 종교’ ‘휴머니즘과 경제’ ‘휴머니즘과 교육’ ‘탈휴머니즘의 도전’ 등 6개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상주 연구원은 25명 안팎이지만, 콘퍼런스와 학술회의에 참여하며 공동 연구하는 학자는 100여명에 달한다. 뤼젠 소장은 “세계 각국의 석학들을 6개월간 초빙해서 공동연구를 진행한다. 단순히 학술 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강연회와 심포지엄, 교육과 출판을 통해 세계적인 네트워크 형성에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는 지금 공존과 공영을 위해 협력하는 인간의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미국 뉴멕시코주 산타페 연구소(Santa Fe Institute)는 근대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는 ‘통합 학문’의 연구를 통해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물리학·생물학·컴퓨터학 같은 과학 및 기술분야, 환경·정치·경제 같은 인문사회과학 영역을 아우르는 통합 학문의 정립을 위해 40여명 연구진이 공동연구를 펼치고 있다. 물고기 무리의 행동 양태에 대한 연구를 통해 주식 투자가들의 행동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고, 개미의 행동 양태를 분석하여 새로운 노사관계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식이다.
2000년 남아공에 설립된 스텔렌보쉬 연구소(The Stellenbosch Institute for Advanced Study)도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을 통합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빈곤과 보건위생 같은 아프리카의 지역적 문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연구를 하면서도 각 분야 첨단지식의 교류와 융합으로 ‘새롭고 종합적인 학문’을 탐색한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라테나우 연구소(Rathenau Institute)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는 대표적인 연구소다. 급격한 기술변화가 인간의 삶의 양식과 사회구조 전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분석한다. 1986년 설립된 이후 매년 세계에서 주목하는 각종 보고서를 내고 있다.
미래의 전망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국가의 실질적인 발전을 가져오기도 한다. 복지와 성장을 동시에 달성하고 있는 북유럽 국가 핀란드는 새로운 환경에 대처하는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의회 산하에 ‘미래 위원회’를 두고 있다. 목재를 팔던 기업 ‘노키아’를 세계적인 IT기업으로 발전시킨 동력은 미래위원회의 ‘선택과 집중’ 전략 때문이다. 부(富)의 편중과는 관계없이 동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핀란드의 명품 교육 역시 미래 진단을 통해 인재를 활용하는 전략에 입각해 있다. 석사학위를 주고 교사가 될 자격을 부여하는 헬싱키대 응용교육학과는 인기가 높아 매년 경쟁률이 10대1을 넘는다. 지난해에도 2061명 지원자 중 10%에 불과한 211명만이 합격했다. 그러나 누구도 교육불평등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지난달 21일 핀란드 헬싱키대 연구실에서 만난 유하니 히토넨(Juhani Hytonen) 학과장은 “핀란드는 누구나 동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지만 결과의 평등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떨어진 사람도 시스템 때문에 떨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경쟁에서 실패하더라도 필요한 곳에 다시 인재를 활용하는 공생의 사회체제 때문이라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