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까지도 태풍과 호우 때마다 울산 중구 구시가지는 침수피해가 반복됐다. 이유가 있다. 바로 태화강 제방 탓이다. 침수를 막기 위한 것이 제방인데 이 무슨 말인가. 구시가지의 지형적 특성과 태화강 제방이 생겨난 배경 속에 그 해답이 있다.
먼저 구시가지의 지형적 특성을 보자. 구시가지는 태화강 북쪽의 함월산에서 뻗어 내린 여러 개의 구릉과 골짜기 주변으로 읍성과 마을이 생겨나 형성됐고, 그 아래로 명정천, 유곡천(강순내), 우교천(강정천), 약사천 같은 소하천이 흘러내려 태화강으로 유입된다. 하천보다 마을이 위쪽에 있었던 덕분으로 조선시대까지는 큰 비가 와도 저지대의 농경지 침수만 잦았을 뿐 마을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1928~1932년 사이 5년에 걸쳐 태화강 제방이 완성되면서 양상이 바뀌었다. 태화강 제방이 태화강으로 유입되는 소하천들의 물길을 막아버린 탓으로 소하천 범람이 잦았다.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인구가 늘어나면서 소하천 주변 저지대에 새로 형성된 마을들이 집중적인 침수피해를 당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옥교동 새치이 마을이다. 침수를 막으려고 제방을 쌓았건만 피해는 농경지에서 마을까지로 확대돼 버린 것이다.
태화강 제방 건설과정< 본지 3월26일자 A14면 울산지리지 참조 >에도 문제가 있었다. 당시 울산수리조합은 제방을 쌓기 위한 논의를 수년간 계속했다. 1926년 6월7일자 조선일보를 보면 ‘소량의 강우로도 홍수가 범람하여 농경지 피해와 인명 피해가 생기니 이를 막기 위해 제방을 만들어야 한다’는 수리조합 측의 입장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조합의 진짜 속내는 다른 데 있었다. 제방을 쌓는 과정에서 삼산들의 공유수면을 매립해 땅을 얻고, 논에 물을 대주는 물장사를 통해 수익을 얻겠다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맡아 제방을 쌓았다. 공사비는 당시 금액으로 총 96만5395원이 들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건설된 울산교의 10배나 됐다. 이로 인해 물장사와 논밭 만들기에는 성공했지만 이 때부터 구시가지는 큰 비만 오면 속수무책으로 침수피해를 입어야 했다. 도시와 땅을 읽는 지혜 없이 눈앞의 이익만 탐했던 결과다.
더불어 태화강 하류에서 울산만으로 이어지면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해오던 항구도시 울산의 면모도 태화강 제방으로 인해 차단돼 버렸다. 이 역시 안타까운 일이다.
현재도 중구 구시가지 저지대는 침수위험에 노출돼 있다. 다만 최근까지 주변에 성남, 학성, 내황, 반구 등의 배수장이 잇따라 설치돼 물난리 걱정은 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