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은 알라딘이 타고 다니는 양탄자 위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영화제 레드 카펫 위의 ‘패션 마법’ 또한 여배우들의 드레스 끝자락에서 비롯되는 휘황찬란한 마법이다. ‘레드 카펫 드레스’란 말이 웨딩드레스만큼 익숙한 패션 용어가 됐음은 물론이다.

지난 23일 밤 열린 청룡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전도연의 드레스는 1000만원쯤 되는 지난가을 시즌 디오르(Dior) 컬렉션이다. 그녀가 지난 5월 칸 영화제에서 입었던 샴페인 골드 빛 드레스는 랄프 로렌.

이런 드레스들은 어떤 경로로 여배우에게 전달될까. 그들이 입었던 드레스는 시상식 이후 어떻게 될까.

칸 영화제를 위해 프랑스로 날아갈 준비를 하던 전도연에게 무수한 브랜드의 드레스 사진이 배달됐다. 수많은 드레스가 그녀의 눈앞에서 경합을 벌였고, 최종 몇 벌이 비행기에 함께 실렸다. 전도연의 여우주연상 수상이 유력시된다는 소문이 파다했기에 브랜드들은 그녀에게 옷을 입히고 말겠다며 노심초사하던 상황이었다.

드디어 시상식 당일. 한국 시각으로 새벽에 칸 현지의 전도연 스타일리스트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 “랄프 로렌을 입기로 했어요.” 휴대폰 메시지를 받은 랄프 로렌 한국 홍보 담당뿐만 아니라, 뉴욕 본사에서도 “어메이징(Amazing·놀라워)!”이란 감탄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달 23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제28회 청룡영화제’의 베스트 드레서 수상자들. 왼쪽부터 김윤진, 손예진, 박시연, 전도연, 김하늘.

김혜수도 레드 카펫 드레스라면 둘째가기 서러운 여배우다. 그녀는 물 건너온 드레스만 고르지 않고 한국의 김연주나 강희숙 같은 국내 드레스를 애용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장진영 역시 과거 국내 브랜드 ‘타임’이 섬섬옥수 만들어준 드레스 차림으로 레드 카펫 위에 섰다. 장미희가 디자이너 정구호가 만든 브랜드 ‘구호(KUHO)’드레스에 애착을 보이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

이에 대해 한 홍보 담당자는 “요즘 멋쟁이 여배우들의 드레스 선택 기준이 달라졌다”며 “과거엔 라벨을 들춰보고 드레스를 입을지 말지 결정하는 여배우가 많았지만 요즘엔 자기 이미지와 맞는지 안 맞는지를 먼저 따진다”고 했다.

한편 “샤크라가 돌아왔네” “베스트 드레서 중의 베스트 드레서”라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는 정려원도 이번 청룡 영화제에서 일반인들에겐 다소 생소한 브랜드를 골랐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악어 백 전문 브랜드 콜롬보가 파리에서 수입한 오트 쿠튀르 브랜드 장 루이 쉐레다. 그녀는 드레스 선택에 몹시 신중을 기울였다는 후문이다. 레드 카펫을 통해 ‘신인 여배우’의 자격으로 공식 데뷔하는 만큼 이미지 결정에 있어 숙고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막판에 쉐레와 경합을 벌인 브랜드는 루이뷔통이었다. 이에 대해 그녀의 스타일리스트는 “루이뷔통을 선택할 경우 기존의 젊은 멋쟁이 스타 이미지밖에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해 결국 희소성이 있는 쉐레의 고상한 드레스로 방향을 틀었다”고 했다.

여배우들은 대형극장 앞에 붉은 양탄자가 주르륵 깔리기 한 달 전쯤부터 담당 스타일리스트와 브랜드 홍보 담당자와 함께 레드 카펫 드레스에 대한 스케줄을 짠다. 그리하여 500만원대에서부터 2000만원대의 드레스 수십 벌이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긴급 공수된다.

여배우들은 스타일리스트의 사무실이나 브랜드 쇼룸에 들러 1차 후보 드레스를 10벌쯤 입어본다. 그 가운데 고른 2차 후보 3벌 정도가 브랜드의 단골 수선집이나 내부 수선실로 전달돼 배우 체형에 맞게 고쳐지고, 그중 1벌만이 전용 드레스로 선택된다. 스타일리스트와 브랜드 홍보 담당자들은 사전 조율을 통해 여배우들의 이름 아래 각각의 드레스를 분산 배치한다. 이런 까닭에 같은 시상식에서 같은 옷을 입은 여배우를 찾아볼 수는 없다.

하지만 시상식이 다를 경우 ‘더블 캐스팅’이 될 수 있다. 박시연의 드레스는 얼마 전 김아중이 홍콩의 한 시상식에서 입은 것과 똑같은 옷이었다. 박시연의 가슴을 유감없이 드러낸 이 드레스는 물 건너 구찌(Gucci)의 홍콩 오피스에서 빌려온 것. 브랜드나 여배우 측은 한반도에서만 겹치지 않으면 괜찮다는 눈치다.

구찌 홍보 담당자는 “박시연은 김아중이 먼저 드레스를 입었다는 걸 알고도 본인이 그걸 원했다”며 “브랜드 이미지가 갈수록 젊어지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다른 글래머 여배우들에게 입히는 것보다 박시연이 낫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여배우의 개성에 맞게 디자인이 변경되고 사이즈가 수정되면 시상식 후 여배우에게 선물로 증정될 거라 짐작한다. 하지만 이렇듯 디자인과 사이즈가 수선되는 건 물론 여배우에게 간택됐든 탈락됐든 간에 시상식이 끝나면 외국의 브랜드 본사로 어김없이 반납된다. ‘거지 근성’이 있는 몇몇 여배우들에게도 레드 카펫 드레스에 관한 한 ‘증정’은 없다. 간혹 여우주연상에게 입힌 드레스가 패션 잡지의 화보 촬영을 위해 사용되기는 한다. 전도연의 디오르 드레스 또한 화보 촬영용으로 쓰이기도 했다.

한편, 레드 카펫 드레스는 여배우들의 깜짝 매직 쇼와 네티즌들을 위한 눈요기로 끝나지 않는다. 판매용으로 재수입되는 드레스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전도연 효과를 본 청담동 랄프 로렌 매장이나 건너편 구찌 매장에는 파티나 연주회를 위해 여배우들의 시상식 드레스와 똑같은 드레스를 찾는 고객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