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이 우리 사회를 더 이상 오염시켜서는 안 된다.”(김용철 변호사) “허위폭로로 불필요한 사회적 논란이 확산되는 걸 지켜볼 수 없다.”(삼성) 삼성그룹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불거진 ‘삼성 비자금 조성과 로비 의혹’ 파문이 김 변호사와 삼성 간의 전면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김 변호사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5일 기자회견을 열어 “이재용 전무의 재산형성 과정이 담긴 내부문건을 추가 폭로하겠다”고 삼성과 검찰을 압박했고, 삼성도 이날 A4용지 25장의 자료를 내서 김 변호사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김 변호사와 삼성이 진실공방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사제단은 일부 시민단체와 함께 이번 사건과 관련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은 6일 검찰에 고발한다는 방침이어서 파문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차명계좌, 비자금 맞나
이번 사건은 김 변호사가 "나도 모르는 차명계좌에 50억원대 예금이 들어 있고, 이는 삼성 비자금"이라고 폭로한 데서 비롯됐다. 김 변호사는 이날 또 이 문제를 제기했다. "불법 로비자금의 출처는 각 계열사에서 조성한 비자금이며, 삼성그룹 고위임원 상당수가 차명계좌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가운데 일부 리스트를 갖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삼성은 "차명계좌와 비자금을 동일시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면서, "김 변호사 계좌의 입출금 내역을 조사해보라"며 강하게 반박했다. 차명계좌는 김 변호사의 재무팀 동료가 미리 양해를 얻어 개설한 개인재산일 뿐 비자금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불법 로비 있었나
삼성이 이 비자금을 활용해 로비를 했다는 주장도 첨예하게 엇갈렸다. 김 변호사는 “삼성에서 불법 로비는 모든 임원의 기본 책무”라며 “구조본에서 검사 수십 명을 관리하고 나머지 분야는 60여 개 계열사가 나눠 맡았다”고 주장했다. 설, 추석, 여름휴가 때 500만~수천만원, 때로 수십억원까지 로비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그는 “현직 검찰 최고위급 검사 가운데도 삼성 돈을 받은 사람이 여럿 있다”고 폭로했다.
그러면서도 김 변호사는 이날 돈을 받은 검사 명단은 공개하지 않았다. 기자들이 공개를 요구하자, “삼성이 저지른 부정과 비리의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 규명이 지지부진할 경우 공개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삼성은 “불법 로비는 없다”고 반박했다. 떡값을 돌린 적도 없고, 특히 김 변호사는 현직 검사 출신으로 처음 입사한 케이스여서 각별히 예우에 신경 썼기 때문에 로비를 지시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에버랜드 사건 증인 조작했나
김 변호사는 또 에버랜드 사건의 증인을 직접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에버랜드 재판과 관련한 모든 증거와 진술은 조작됐으며, 나도 그 일에 관여했다”며 “이 당시 법무팀장을 맡은 나도 공범으로서 처벌을 받을 순간이 됐다”고 했다.
에버랜드 사건은 삼성이 1996년 에버랜드 전환사채를 이건희 삼성 회장 자녀들에게 저가에 배정, 삼성 지주회사인 에버랜드의 경영권을 넘겼다가 2000년에 고발된 사건이다. 그룹 핵심인사 대신 에버랜드 전·현직 사장이 죄를 뒤집어쓰도록 했다는 게 김 변호사의 주장이다. 그러나 삼성은 터무니없는 얘기라는 입장이다. “많은 시민단체와 언론의 주목을 받아 3년 반에 걸쳐 수사와 재판이 이뤄졌는데 어떻게 증인조작이나 참고인 빼돌리기가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시민단체, 대신 검찰에 고발키로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시민단체들은 6일 오후 2시쯤 기자회견을 갖고 삼성그룹의 불법행위에 대해 관련 의혹을 검찰에 고발할 예정이다. 사제단과 김 변호사 모두 직접 고소·고발하는 데 따른 부담을 느끼는 상황에서, 시민단체들이 대신 고발장을 접수하는 형식이 된 것이다.
사제단 김인식 신부는 “뜻있는 시민단체나 학계와 함께 삼성문제를 다룰 것”이라고 말해,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할 방침을 내비쳤다. 향후 국면은 사제단은 한 발 물러서고, 공동대책위 중심으로 사건이 굴러가게 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도 긴급회의를 갖는 등 비상이 걸렸다. 삼성도 “무대응으로 자제할 경우 그룹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명예훼손 소송을 내는 등 강공 쪽으로 기류를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용철 변호사는 누구
검사시절 ‘전두환 비자금’ 찾아내… 언론사 기획위원 활동도
1989년 인천지검 검사를 시작으로 8년 반 동안 검사로 있다가 1997년부터 7년간 삼성그룹 변호사로 일했다. 동료 검사들은 "검사 시절에는 말수가 적고 술자리를 피하는 편이었다"고 기억한다.
1995년 말 '12·12와 5·18사건 특별수사팀'에 차출돼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이 보관하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과상자 61억원을 찾아냈다. 이때 김 회장 관련 수사를 계속하려다 검찰 수뇌부와 갈등을 빚었고 그 후유증으로 97년 검찰을 떠나 삼성행(行)을 택했다고 본인은 주장한다.
재작년 9월부터 한겨레신문 비상근 기획위원으로 활동했고, 한겨레신문에 삼성 비판기사가 보도되면 삼성측은 "김 변호사가 취재원 아니냐"고 의심을 하기도 했다.
▲고려대 법대 ▲사시 25회(83년 합격) ▲인천지검·홍성지청·부산지검 검사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검사 ▲삼성그룹 법무팀·재무팀 이사·법무팀장 ▲법무법인 서정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