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漢字)는 한자인데 나라마다 다른 한자'이기 때문에 곤란을 겪던 동아시아의 불편은 해소될 수 있을까? 한국과 중국, 대만, 일본의 학자들이 자형을 통일한 5000~6000자의 표준 한자를 만들기로 지난달 31일 합의함으로써, 지난 1991년부터 17년째 계속되고 있는 '국제한자회의'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또한 중국측이 돌연 '번체자(繁體字·정체자)와 간체자(簡體字)의 화평공존(和平共存)'을 주장하며 대단히 적극적인 자세로 돌아선 것이 주목된다. 이로써 회의 자체는 탄력이 붙게 됐지만, 국내 참석자들은 '자칫 회의의 주도권을 중국이 장악할 수 있다'는 우려도 숨기지 않았다.

◆4년 만에 열린 회의

국제한자회의는 지난 1989년 한일협력위원회 합동총회에서 한국측이 공동의제로 제안한 '한자 표준화 문제'의 결과물이다. 신현확(申鉉碻) 전 총리가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았으며, 이후 정병학(鄭秉學)씨를 회장으로, 남광우(南廣祐)·이재전(李在田)씨 등을 이사로 한 국제한자진흥협의회가 출범해 7차례의 회의를 이끌었다.

2001년 서울에서 열린 제6회 회의 때는 '강희자전(康熙字典)'을 기초로 각국에서 동일한 자형과 자획을 가진 한자 1996자를 뽑아 공통 한자 수의 기준으로 정하는 성과도 이뤄냈지만, 나라마다의 입장 차이 때문에 2003년 일본 도쿄에서의 제7회 회의 이후엔 회의 자체가 열리지 못했다. 그 사이 신현확·정병학·남광우·이재전씨 등도 모두 작고했다. 그런데 가장 소극적 태도를 보여 오던 중국이 최근 갑자기 정부 차원에서 나서서 "모든 경비를 전담할 테니 베이징에서 회의를 열자"고 제의해 온 것이다.

◆대단한 자신감 드러낸 중국

이번 제8회 회의에서 이응백(李應百) 서울대 명예교수, 김언종(金彦鍾) 고려대 교수 등 한국측 참석자들은 표준 자형에 관해 상당히 구체적인 연구 성과를 축적한 논문을 발표했다. 대만측 참석자들은 정체자를 '번체자'라고 지칭하는 용어 자체에 '번잡하다'는 관점이 들어 있다고 지적하고, 전통 문화를 계승한 글자는 정체자임을 역설했다.

중국측은 회의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한마디로, 자형을 통일하는 국제적인 노력을 통해 한자를 세계에 보급하는 데 주도권을 쥐고 나가겠다는 것이다. 한자가 '동아시아 공통의 문화 유산'이라는 말 대신 '중국의 것'임을 강조하는 발표문도 있었다. 하지만 '번체자'와 '간체자' 중에서 어느 한 가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번·간의 화해(和解)와 공처(共處·공존)'를 추구하겠다는 것이 중국측 참석자들의 주장이었다. 발표자로 나선 둥쿤(董琨) 중국 사회과학원 어언(語言)연구소 연구원은 "번체자와 간체자 모두 중화 문화의 전달 수단이며, 염제(炎帝)와 황제(黃帝)를 조상으로 한 중국 동포들이 이 역사적 유산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을 배제하고 논의할 수도"

이와 같은 중국의 태도는 최근의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한 신흥 민족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한국측 참석자들의 분석이다. 김언종 교수는 "기대와는 달리 '번체자를 없애지 않겠다'면서도 '간체자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 중국의 입장임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일부 중국 학자는 사석에서 "이렇게 해 놓으면 언젠가는 번체자가 없어지고 간체자로 통일될 것"이라는 희망사항을 밝히기도 했다. 원래 대만에서 개최할 차례이던 내년 회의를 중국측이 '한국에서 열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해 관철시킨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우리측의 한 관계자는 "중국이 계속 자기들의 입장만을 강하게 주장한다면 우선 한국·북한·일본·대만·홍콩 등이 한자의 '1단계 통일'을 이루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러기 위해선 국내의 한자 교육을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