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31일 서울 LG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연극 '십이야(Twelfth Night)'는 특별하다. 어렴풋이나마 셰익스피어 시대의 '여형(女形·남성이 표현하는 여성)' 연기를 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1564~1616) 시대엔 여배우가 없었다. 배역 중 여자는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소년이 맡았다. 그래서 셰익스피어 작품들엔 여자가 적게 등장하고 배역의 비중도 작다.
영국 연출가 테클란 도넬란은 2003년 러시아 남자 배우들만 기용해 이 '십이야'를 초연했고, 이번 내한공연에도 남자들(미소년은 아니다)이 여자 배역을 맡는다. 영국과 러시아의 최고 연극상인 로렌스올리비에상과 황금마스크상을 받았던 도넬란은 '십이야'로 올해 미국 드라마데스크어워드에서 연출상을 차지했다.
'십이야'는 셰익스피어가 30대 후반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셰익스피어 작품 중 '리어왕'이 비극의 최고봉이라면 희극으론 '십이야'"라는 평도 받는 수작이다. 제목엔 예수 탄생 열두 번째 날의 떠들썩한 축제라는 뜻이 담겨 있다.
뒤엉킨 사랑 이야기다. 쌍둥이 남매 세바스찬과 바이올라가 풍랑을 만나 헤어진 뒤, 바이올라는 남장을 한 채 오시노 공작의 시중이 된다. 오시노 공작을 사랑해서다. 그런데 오시노 공작은 연인 올리비아에게 마음을 전하는 전령사로 바이올라를 보낸다. 이 대목에서 이야기는 한 번 더 꼬인다. 올리비아가 첫눈에 바이올라에게 반해버린 것이다.
남장 여자가 등장하는 원작은 출연진 12명을 남자로만 구성한 연출가의 아이디어로 재미가 더해졌다. 극 중 여자로 설정된 3명을 모두 남자가 연기한다. 남자처럼 보이려고 애쓰는 바이올라, 영락없이 여성스러운 올리비아를 맡은 배우들은 얄미울 정도의 여자 연기로 예측불허의 웃음 폭탄을 던진다.
서양의 많은 예술가들이 그렇듯, 도넬란도 동성애자다. 1994년 셰익스피어 원작 ‘뜻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에서도 모든 배우를 남자로 바꾼 적이 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성(性)의 경계를 허문 도넬란의 ‘십이야’에 대해 “더없이 행복하고 즐거운 작품”이라고 호평했다.
셰익스피어 낭만희극 ‘한여름 밤의 꿈’으로 지난해 영국 바비칸센터에 초청된 젊은 연출가 양정웅은 여자들만 나오는 ‘십이야’를 구상 중이다. 또 재작년 연출가 박재완은 남녀의 배역을 바꾼 ‘트랜스(trans) 십이야’를 공연하기도 했다. “뒤집어서 새롭게 보고 ‘젠더(gender·사회적 의미의 성) 게임’도 하려고 했다. 트랜스젠더가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분위기도 타고, 덤으로 재미도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남장 여자보다는 여장 남자라는 설정이 훨씬 흥미롭다 ▲관객 대부분이 여성이라 흥행도 고려해야 한다 등의 분석도 했다.
성의 역할 바꾸기, 이른바 ‘트랜스(trans)’는 최근 문화계의 트렌드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이준기가 여장 남자의 매력을 보여줬다면, 올해 히트한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는 윤은혜가 남장 여자의 표본으로 남았다. 남녀 배우의 역할을 바꾼 뮤지컬 ‘헤드윅’, 근육질 남성 백조들이 등장하는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국내에서 흥행이 보장되다시피한 공연들이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뮬란’ 등 과거 남장 여자의 이야기들은 여성이 사회에 참여하는 영웅담에 가까웠다. 하지만 요즘엔 상대적으로 여장 남자의 이야기가 많다. 최혜실 경희대 교수는 “페미니즘(여성학)에 대한 반발로 남성의 역차별을 연구하는 남성학이 최근 인기”라며 “여장 남자라는 설정도 시간이 지나고 남녀의 지위가 같아질수록 희극성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양에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여형’의 전통이 있다. 중국의 경극(京劇), 일본 가부키(歌舞伎)가 대표적이다. 200년 역사의 경극에는 영화 ‘패왕별희’에서 장궈룽(張國榮)이 맡았던 것처럼 단(旦)이라는 여자 배역이 있다. 청나라 말기까지는 남자만 경극에 출연했고, 20세기 들어서도 메이란팡(梅蘭芳)을 비롯해 여자만 전문적으로 연기한 배우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400년 넘은 가부키도 여자 배역만으로 평생을 사는 온나가타(女形)를 따로 두고 있다.
일본의 5대 가부키 배우로 꼽히는 나카무라 간지로(中村雁治朗)는 “온나가타(여형)에게 중요한 건 무용과 발성이다. 양 무릎을 붙이고 부드럽게 걷는 법, 어깨 늘어뜨리기 등 고난도 기술을 익힌다”며 “늙어서 ‘내가 공연을 망쳤구나’ 싶으면 바로 은퇴할 것”이라고 말했다.
거꾸로, 여자가 남자 배역을 맡는 공연물도 있다. 한국의 여성국극, 일본 가극단 ‘다카라즈카(寶塚)’가 대표적이다. 다카라즈카 배우들은 결혼이 금지되고 본명이나 나이도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십이야’는 11월 3일까지 공연. (02)2005-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