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 일본 남단 오키나와(沖繩)에서는 10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자기네 정부의 역사왜곡을 규탄하는 대규모 현민대회(縣民大會)가 열렸다. 집회는 오키나와전투에 대한 문부과학성의 역사왜곡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뜨거웠다. 도대체 ‘오키나와전투의 역사왜곡’이나 ‘역사교과서의 검정의견’이란 무엇인가? 한일관계에 대한 ‘역사왜곡’이나 ‘교과서검정’을 둘러싸고 일본과 수십 년 동안 갈등을 겪어온 우리로서도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종래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는 오키나와전투에 관해, ‘일본군에게 집단자결을 강요당하고, 전투에 방해가 된다든지 스파이혐의를 받아 살해된 사람도 많아’ ‘비참함이 극에 달했다’라는 식으로 기술했다. 그런데 문부과학성은 이에 대해 ‘오키나와전투의 실태를 오해하게 만들 우려가 있는 표현’이라는 검정의견을 달았다. 그 결과 올해 3월 말에 공개된 검정 교과서 합격본에서는 ‘일본군의 강요’라는 부분은 사라지고, ‘궁지에 몰려 집단자결’했다는 식으로 표현이 바뀌었다. 저간의 경위를 알게 된 오키나와현민들은 문부과학성이 오키나와전투의 실상을 왜곡하고 있다며 당국을 상대로 검정의견 철회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오키나와전투의 실상은 무엇인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미국과 일본은 오키나와에서 격렬한 공방전을 되풀이했다. 이 전쟁은 몇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일본이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장기간 필사적으로 버틴 최후의 지상전이었다. 둘째, 일본이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청소년을 비롯한 주민을 군에 동원한 총력전이었다. 셋째, 군대보다도 주민의 희생이 더 커서 주민의 사망자만도 십수만 명이었다. 일본군이 스파이혐의를 씌워 학살하거나 이른바 옥쇄(玉碎·명예로운 자결)란 이름으로 주민을 집단 죽음으로 내몬 경우가 적지 않았다. 넷째, 우리로서 잊지 못할 사실로서, 1만여 명의 조선인이 군부(軍夫)나 ‘군대위안부’로 동원되어 혹사당했다.
일본정부로선 이 같은 역사적 치부가 역사교과서에 정확히 기술되는 것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일본군에 의한 주민학살’이라는 기술을 삭제하고, 대신에 ‘일본군에 의해 집단자결로 내몰렸다’는 식으로 기술하도록 유도했다. 그런데 금년에는 그것마저 ‘군의 명령 여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워, ‘궁지에 몰린’ 주민이 숭고한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집단자결한 것처럼 기술하도록 한 것이다.
일본 문부과학성의 이런 검정자세는 최근 기승을 부린 우익의 역사수정 캠페인이나 자민당 일각에서 벌어지는 역사미화 시도의 연장선이다. 그들은 이미 ‘남경대학살’과 ‘군대위안부강제연행’ 등 일제에 의해 국외에서 벌어진 만행을 부정하고, 그것을 교과서 기술에서 삭제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오키나와전투에 대한 기술의 수정요구는 그 여세를 몰아 국내에서 벌어진 일까지 왜곡·개찬하려는 속셈을 보여준 것이다.
오키나와전투를 실제로 경험한 주민들이 이와 같은 책동을 좌시할 리 없다. 그들은 ‘오키나와전투의 실상을 지워서는 안 된다’라는 목표 아래 수차례 현민대회를 개최하고, 현의회는 문부과학성에 검정의견의 철회를 요구하는 결의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성의 없는 자세를 취한 아베 총리를 응징하기 위해 참의원선거에서 자민당에 참패를 안겼다. 교과서 왜곡으로 한국 중국 등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고 있는 일본은 오키나와 전투의 기술을 놓고 국내에서조차 심각한 저항에 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내전(內戰)’은 제국일본에 희생을 당한 아시아 민중들로서도 깊은 관심으로 지켜봐야 할 국제문제이다. 특히 오키나와전투에서 많은 동포가 무고하게 죽은 한국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모처럼 아시아외교 중시를 표방하고 출범한 후쿠다 정권은 국내에서조차 반발을 초래하고 있는 ‘역사개찬 캠페인’을 중지하고, 근린제국과 공생공영을 이룩할 수 있는 역사인식을 수립하는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