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절 풍미한 영화·만화·드라마가 뮤지컬 무대에서 자존심을 구기고 있다. 올 들어 ‘원소스멀티유즈(One Source Multi Use)’ 제작 방식에 따라 장르를 변형한 창작 뮤지컬 ‘댄서의 순정’(영화), ‘위대한 캣츠비’, ‘바람의 나라’, ‘달려라 하니’(이상 만화), ‘대장금’(드라마)에 대한 반응은 신통치 않다. ‘제2의 삶’을 얻고도 흥행한 장르변형 뮤지컬의 성공담은 ‘라이온 킹’ ‘오페라의 유령’ ‘킹 앤 아이’ ‘프로듀서스’ 등 나라 밖 이야기일 뿐이다.

흥행 성적도, 품평도 기대 이하다. “급하게 만들어 초연으로 운명이 결정 나는 한국적 제작·공연 시스템으로는 승산이 없다”는 회의론까지 나오고 있다. 그나마 강도하의 만화를 손질해 박근형이 연출한 ‘위대한 캣츠비’, 2003년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한류(韓流) 드라마가 원작인 ‘대장금’은 수익을 낼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들마저도 평단이나 뮤지컬 마니아들의 초반 반응은 냉랭했다. 숱한 장르변형 창작 뮤지컬들이 왜 이토록 고전하는 것일까.

◆원작을 넘어야 산다

조용신 뮤지컬 칼럼니스트는 “실패한 작품들은 대부분 원작의 이야기 덩치가 크다”고 말했다. 150분간 공연한다고 치면, 음악을 빼고 약 90분에 모든 드라마를 풀어야 하는데 그 압축 과정에서 탈이 난다는 지적이다. 종종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비약, 허약한 갈등 구조, 주인공의 존재감 상실 같은 결과를 낳는다.

장르변형 뮤지컬이 원작을 잘 아는 사람들을 위한 ‘오마주’에 머물 때 그 작품은 주저앉는다. 이는 대중성을 지향하는 뮤지컬의 본능과도 부대끼는 부분이다. 80년대 인기만화 ‘달려라 하니’를 뮤지컬로 제작한 서울시뮤지컬단의 유희성 단장은 “만화의 텍스트를 다루기가 어려웠다”며 “‘원작을 넘어서야 살아남는다’는 단순 명쾌한 진리를 다시 실감했다”고 말했다. ‘댄서의 순정’과 ‘대장금’도 원작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전한 경우다.

영화가 뿌리인 뮤지컬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2004년 초연과 달리 매년 공연을 거듭하며 품질이 나아진 경우로 꼽힌다. 70~80년대 히트곡들을 모은 주크박스 뮤지컬. 배우들의 호연과 대극장을 채울 만한 재미로 관객도 붙고 있다. 하지만 음악을 열망했으나 꿈을 접고 살아가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뮤지컬에서는 페이소스를 잃었다는 평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로저스와 해머스타인 콤비는 원작 소설과 영화를 본 뒤에 뮤지컬 ‘킹 앤 아이’를 만들었다. 그들은 동양과 서양, 독재와 민주주의 남성과 여성 등 복합적인 소재들로 갈등을 구축하고 ‘쉘 위 댄스’ 같은 끈끈한 음악으로 그 틈을 메웠다.

◆뮤지컬의 주인공은 음악

뮤지컬은 온전히 독립된 장르다. 영화·만화·드라마와는 다른 언어와 화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 장르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노래와 춤, 연기를 적당히 섞는 레시피(요리법)를 썼다 망하는 작품이 많다.

뮤지컬 월간지 ‘더 뮤지컬’의 박병성 편집장은 “뮤지컬 문법의 핵심은 드라마와 음악의 조화”라고 강조했다. 음악이 드라마를 전개시킬 정도로 강한 추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배경음악쯤에 머물거나 ‘노래 따로 이야기 따로’인 뮤지컬이 적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그는 “좋은 뮤지컬은 언제 노래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노래가 드라마에 잘 녹아 있다”고 설명했다. 조용신씨는 “’위대한 캣츠비’는 배우들이 노래할 때 대부분 정지 동작이라는 점에서 뮤지컬적 음악이라고 하기 어렵다”며 “이야기와 음악이 서로 겉돌지 않고 잘 비벼져 있어야 좋은 뮤지컬”이라고 말했다.

연극 ‘이(爾)’는 영화 ‘왕의 남자’, 뮤지컬 ‘이’로 거듭 변신했다. 하지만, 영화는 성공했고 뮤지컬은 실패했다. “연극의 줄거리에 노래를 몇 곡 넣은 것 아니냐”는 반응이 많았다. 영화음악가가 음악을 맡은 ‘대장금’의 경우 서정성은 있지만 서사성이 떨어지는 약점을 노출했다.

음악 중심의 뮤지컬 문법에서 벗어났지만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 작품도 있긴 했다. 서울예술단이 공연한 ‘바람의 나라’(연출 이지나)다. 이미지와 춤을 중심으로 드라마를 전개시킨 ‘바람의 나라’는 “비주류적이지만 신선했다”는 일각의 호평을 얻었다.

◆야심찬 비주얼을 만들어라

청각보다는 시각이 빠르다. ‘오페라의 유령’은 추락하는 샹들리에, 호수, 투신 같은 낭만적인 비주얼로 유명하다. 또 6월에 200회를 돌파하는 ‘라이온 킹’ 한국 공연이 섬세한 가면·인형으로 동물들을 표현한 것처럼, 성공한 장르변형 뮤지컬들 중엔 비주얼이 압도적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60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대장금’을 비롯해 올해 초연한 장르변형 창작 뮤지컬들 중엔 ‘바람의 나라’를 빼면 기억될 만한 비주얼을 보여준 작품이 없다. ‘달려라 하니’의 경우 하니의 달리기 장면이 하이라이트인데 밋밋하게 처리됐다는 지적이다. 조용신씨는 “가장 역동적일 수 있는 부분을 평면적으로 마감했다. 회전 무대를 적절히 사용할 수도 있었다”며 아쉬워했다. “좋은 비주얼을 만드는 건 돈이 아니라 아이디어”라는 말도 나왔다.

그래서인지 국내 장르변형 뮤지컬은 시트콤 형식에 집착한다. 비주얼의 약점을 재미로 보강하려는 전략이다. 영화 원작으로 6월 초연될 뮤지컬 ‘싱글즈’도 ‘뮤직 인 마이 하트’의 성재준이 연출한다는 점에서 그런 형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연간 20% 안팎으로 성장하고 있는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 장르변형 창작은 앞으로도 줄을 이을 전망이다. 소재는 빈곤하고 원작의 인지도는 탐나기 때문이다. 뮤지컬 제작사 쇼팩 송한샘 대표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긴 어렵고, 투자자들은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올 하반기에도 만화 영심이를 바탕으로 한 ‘젊음의 행진’, 영화가 원작인 ‘신부수업’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내 마음의 풍금’ 등이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품질은 뚜껑을 열어봐야 알지만 제작 기간이 길지 않았다는 게 노출된 약점이다. ‘불의 검’에 이어 ‘위대한 캣츠비’까지 만화 원작 뮤지컬들을 제작한 코코즘 관계자는 “원작의 장점들 중 뭘 취하고 뭘 버려야 하는지 배우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