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벚꽃하면 대부분 왕벚나무를 뜻하는데, 이 나무의 원산지를 놓고도 한·일 간에 원조 논쟁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왕벚나무를 소메이요시노사쿠라(染井吉野櫻)라고 부른다. ‘소메이’는 현재의 도쿄 도시마(豊島)구의 소메이촌(染井村)에서, ‘요시노’는 나라의 요시노산(吉野山)에서 각각 따와 식물학자 후지노(藤野寄命)가 1900년에 합성해 만든 말이다. 현재 일본 학계는 나라의 요시노는 후지노가 잘못 합성한 것이라며 도쿄의 소메이촌설(說)을 더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1914년 미국의 식물학자 윌슨이 일본을 방문해 왕벚나무의 자생지(自生地)를 물었을 때도 일본 식물학자들은 요시노산 또는 오오시마(大島) 등으로 대답해 도쿄로 인식하지 않고 있었다.
제주도에 선교사로 온 프랑스인 타퀘르 신부는 1908년 한라산에서 왕벚나무를 발견했으며, 1912년에는 독일의 식물학자 퀘흐네가 한라산 관음사(觀音寺) 부근에서 왕벚나무를 발견해 학계에 보고함으로써 제주도 자생지설이 유력해졌다. 일제는 창경궁에 조직적으로 왕벚나무를 심고 창경원으로 격하시킨 후 일반에게 공개해 벚꽃축제 열풍을 일으켰다. 그런데 미국에서 발행하던 ‘국민보(國民報)’ 1943년 4월 28일자는 아메리카대학교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정 수립 24주년 기념식에서 이승만 박사가 체리나무(벚나무)를 기념 식수했다면서 한 해 전에는 미 내무대신에게 워싱턴 포토맥 강가의 체리나무 원산지를 일본에서 한국으로 고쳐줄 것을 요청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은 ‘화하만필(花下漫筆)’에서 “벚꽃이 조선에서 애상(愛賞) 받은 적은 없었다”라면서도 유명한 우이동 벚꽃은 효종이 북벌 때 궁재(弓材)로 쓰려고 심었다고 했으니 350여 년 전의 것이 된다. 전국 각지에서 벚꽃축제가 열리고 있는데 벚꽃의 자생지가 제주라 해도 축제의 유래가 일제 식민 통치의 일환이었다는 점 때문에 흔쾌하지 않다. 각 가정에서 벚꽃을 심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대부분의 공공장소는 벚꽃 일색인 이유가 순전히 꽃이 좋아서 심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꽃에까지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한·일 역사의 한 단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