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적인 액션영화들로 큰 성공을 거둔 할리우드 제작자 마이크는 어느 날 두 괴한에게 납치되어 죽을 위기에 처한다.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그는 멕시코계 정원사 가족 틈에 숨어 정원사로 위장해 살아간다. 마이크가 납치되었던 현장에선 두 괴한의 시체가 발견되고 신문엔 마이크의 실종기사가 실린다. 한편 컴퓨터 과학자이자 감시 전문가인 레이는 도시 곳곳에 설치된 감시카메라에서 전송된 이미지들을 주시하던 중 마이크가 괴한들에게 협박당하는 광경을 보게 되고 이후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한다.
한때 영화청년들에겐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던 독일감독 빔 벤더스는 1990년대 이후 과거의 명성을 무색하게 하는 범작들과 태작들을 내놓으며 그의 지지자들을 실망시켰다. 특히 1997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되었던 '폭력의 종말'은 그의 영화적 재능을 의심케 하는 졸작이라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세간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벤더스의 영화세계를 이루는 각양각색의 요소들이 곳곳에 숨겨진 이 흥미로운 작품을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을 듯싶다. 여기서 벤더스는 범람하는 이미지와 폭력, 감시의 테크놀로지와 개인, 중심이 없는 음모의 구조 등등의 동시대적 주제들을 느슨하게 펼쳐 놓았다. '실종'의 모티브를 끌어들여 영화와 삶의 관계에 대한 반성적 사색을 시도하는 방식은 벤더스의 팬들에겐 이미 익숙한 것이다.
벤더스는 자신에게 큰 영감을 제공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를 꼽곤 하는데, '폭력의 종말'에는 호퍼의 작품 '밤샘하는 사람들'(Nighthawks, 1942)을 차용한 멋진 장면이 등장하니 눈여겨보길 바란다. 한편 극중에서 레이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인물은 벤더스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미국 B급 영화의 대가 새뮤얼 풀러이다. 그는 이 영화가 공개된 1997년 세상을 떠났다. 원제 'The End of Violence'. 122분. ★★☆ (5개 만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