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랗고 빨간색의 한자 간판이 한글 간판만큼 많은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조선족 거리’. 21일 아침 ‘김씨 여성 삼인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린(吉林)성·북한 음식 전문 ‘연길 미식성’ 주인 김연화(38)씨와 베이징(北京) 요리 전문 ‘로최식당’ 주인 김련옥(48)씨. 이웃 사촌이자 라이벌인 두 사람 뒤를 막내 김춘례(30)씨가 따른다.

두 언니가 땅에 떨어진 음식 찌꺼기, 빈 캔, 우유팩 등을 능숙하게 담는 동안, 김춘례씨는 검은 비닐봉투에 아무렇게 담아 내버린 쓰레기 봉지가 없는지 동네 곳곳을 살핀다.

“쓰레기 종량제에 참여하자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잔소리를 해댔는데, 이제야 효과가 나타나나봐.”(김련옥)

“그러게. 두 달도 안됐는데 몰라보게 깨끗해졌어요.”(김춘례)

이 세 김씨는 작년 말 결성된 가리봉동 ‘외국인 깔끔이 봉사단’의 초기 멤버다. 구로구 주민들이 조직한 주민 깔끔이 봉사단을 조선족 동포들이 벤치마킹했다. 올 들어 60여명으로 급속히 늘었다. 처음에는 러시아와 동남아인도 몇몇 합류했으나 지금은 조선족으로만 구성됐다.

단체로 맞춰입은 조끼를 입고 가리봉동 골목을 청소하고 있는 조선족 깔끔이 봉사단원들. 구로구 제공

깔끔이 단원들은 대부분 음식점 안주인들이다. 주 메뉴가 고기요리라 뼛조각 등 음식쓰레기들이 많다. 하지만 단원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음식점과 식료품점으로 가득한 골목골목을 훑고 지나간 자리는 마치 진공청소기로 한 번 쓱 민 듯 말끔하다. 3년 전 한국인과 결혼해 귀화한 김연화씨가 대장 격이다.

"중국에서는 따로 규격 쓰레기 봉투를 쓰지 않고 한 사람당 위생비만 따로 걷고 말아요. 그 습관대로 사는 분들이 많다 보니 거리가 온갖 쓰레기봉지들로 가득차게 됐어요."

김련옥씨도 "동네가 지저분해졌다는 말을 전해듣고 우리(조선족) 이미지 쇄신을 위해서라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좁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벌집촌'이라는 썩 달갑지 않은 별칭으로 알려진 가리봉동. 90년대를 지나오며 '서울 드림'을 꿈꿨던 근로자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외국인들이 메워갔다. 가리봉 1·2동을 합쳐 2003년 1747명이던 것이 작년에는 4373명으로 급증했다. 한족(漢族)출신이 더러 있을 뿐 대부분 조선족들이다. 조선족이 전체의 94%인 4132명이고 한족이 184명, 필리핀인 8명 등이다. 하지만 미등록자도 많아 실제로는 5000명을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 사람들의 삶은 아직 척박하다. 매일 새벽에는 인력시장에서 하루 일감을 찾으려는 중·장년층 남성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고, 골목골목마다 몰려있는 식료품점과 크고 작은 식당들도 매상을 위해 자정 넘어까지 영업을 한다. 그래도 한국의 대학에 유학온 조선족 젊은이들이 한국말이 서투른 이들에게 무료 교습을 해주는 등 끈끈한 정(情)도 남아있는 동네다.

설 연휴의 흥청거림도 식당 안주인들에게는 ‘남 얘기’였다. 전국 각지에서 일하던 조선족들이 친지를 만나러 대거 몰려왔는데, 방이 턱없이 좁아 자연스레 음식점이 사랑방이 됐다. ‘대목’을 놓칠 수 없는 깔끔이 봉사단원들 대부분 연휴 내내 24시간 가게문을 열고 일을 했다.

김춘례씨는 “내 일터가 있고 집이 있는 ‘우리 동네’인 만큼 깨끗하게 쓸고 닦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당면과제는 ‘외국인 깔끔이 봉사단’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다국적 군대’를 꾸리는 것. 일단 ‘말이 통하는’ 한족들부터 포섭할 참이다. 구로구청 청소행정과 김성종 주임은 “서울에서도 잘 나가는 ‘차이나 타운’으로 사랑받을 수 있게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