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에서 ‘의사(醫師)’라는 직업이 대체로 사회적·경제적 지위가 보장되는 선망의 대상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과연 그 직업의 ‘과거’는 어땠을까? 사실 의관(醫官)을 포함한 중인(中人) 계층의 활동과 생활에 관한 연구는 아직까지도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의관 집안의 가계(家系)를 조사해 ‘옛날 의사’들의 생활과 활동상을 분석한 논문이 처음으로 나왔다. 당시의 의원들 중에서도 국왕의 진료를 직접 맡을 만큼 최고 수준에 해당했던 이들은 의외로 사회적 지위가 매우 불안정했고, 임무는 고통스러웠던 것으로 나타났다.
김양수(金良洙) 청주대 인문학부 교수(조선후기사 전공)와 안상우(安相佑) 한국한의학연구원 학술정보부장은 최근 학술지 ‘동방학지’(연세대 국학연구원 刊)에 ‘조선 후기 의관 집안의 활동’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김양수 교수가 처음 안산(安山) 이(李)씨 가문의 고문서를 접한 것은 지난 2002년이었다. 이 가문의 후손 이덕규(李德圭)씨가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족보와 문집의 해독을 의뢰해 왔다. 조선 후기 중인 계층에 대해 연구해 오던 김 교수는 깜짝 놀랐다. 영조 때의 의관 강명길(康命吉) 집안의 간략한 가계도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조선시대 유명한 의관 집안의 1차 사료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 교수는 이씨가 가지고 온 안산 이씨 13대 이현양(李顯養·1783~1852)의 문집 ‘곡청사고(谷靑私藁)’와 이후 추가로 입수한 ‘안산이씨세보(安山李氏世譜)’를 바탕으로 이 가문 의관들의 활동과 생활에 대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한의학 분야의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는 안상우씨가 맡았다.
안산 이씨는 7대 이윤영(李贇英)부터 15대 이명윤(李明倫)까지, 시대로는 1660년쯤부터 1900년대까지 8대 240여 년 동안 20여명의 의관을 배출한 집안이었다. ‘3대 이상이 의원인 집안의 약을 복용해야 한다’는 조선시대의 속설을 생각해 보면 상당한 의학 명문가였던 것이다.
이들의 의과 합격 평균 나이는 23.2세였고, 이들 중 3분의1은 궁중의 의약을 맡은 관청인 내의원(內醫院)에 속한 내의(內醫)가 됐다. 지방관으로 임명되는 경우에도 유사시에 국왕이나 왕세자를 진료할 수 있도록 가까운 경기도 양천이나 적성 같은 곳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들의 지위는 매우 불안정했다. 의관의 대부분은 6개월마다 교체되는 임시직인 체아(遞兒)였다. 의관들은 수행원들을 자기 돈으로 고용하고 훈련해야 했으며, 말을 구입하는 비용도 지불해야 했다. 19세기 저명한 어의(御醫)였던 이현양도 당시 세도가인 풍양 조씨가 18일 동안 금강산 유람을 떠날 때 수행 요청을 받고는 ‘분부대로 따라가서 노는 데 짐이나 되겠습니다’라며 응할 수 밖에 없었다.
논문은 이들의 경제적 상황에 대해서는 결론을 유보하고 있다. 이현양이 200냥에 묘전(墓田·무덤에 딸린 밭)을 구입했다는 사실 이외에는 자료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의학사 연구로는 의관 집안이 대체로 부유했다고 여겨 온 반면, 이덕규씨는 선대가 곤궁한 생활을 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들이 당대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었음은 분명하다”고 김양수 교수는 말했다. 안산 이씨를 비롯한 중인 가문은 시대에 따라서 의관과 역관(譯官)을 지내며 외국어와 의학이라는 첨단 지식과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언제라도 최고 권력자인 국왕 곁에 접근해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신분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