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리리~ 삐~~이~잉"
4일 오전 5시 서울시 광진구 건국대학교 교내 호숫가. 어디선가 심상찮은 소리가 들려왔다. 가냘프고 구슬픈 피리소리다. 금속처럼 차갑지도, 나무처럼 둔탁하지도 않다. '입소리'는 맞는데 생전 처음 들어보는 울림이다. 무슨 악기인지 궁금해하고 있을 무렵, 중년 사내 하나가 나뭇잎 달랑 한 장 들고 나타났다. 길가에 돋아난 풀만으로 아름다운 소리를 빚는 박찬범(朴燦凡·58)씨. 우리나라에 한 명뿐인 초적(草笛·풀피리) 예능보유자다.
박씨를 따라 건국대 인근에 있는 '풀피리 연구소'를 찾았다. 10평 남짓한 한 칸짜리 옥탑 방. 가죽 해진 장구와 크고 작은 북 몇 개가 놓여 있다. "명색이 풀피리 연구손데, 나뭇잎 한 장 없어요. 볕이 안 들어서, '악기'를 키울 수 없거든. 그래서 매일매일 많이 따서 이리로 들어와요." 아침에 딴 사철나무 잎 하나를 입에 가져다 댔다. 상록수인 귤나무나 유자나무 잎이 풀피리로 쓰는 데 최고라 했다.
"농사꾼이셨던 아버지께서 풀피리를 기가 막히게 부셨죠. 근데 내가 좀 불어보려고 하면 '니 피리쟁이 될라고 그러냐'며 호통을 쳤어요. 그런데도 그 소리가 어찌나 좋던지…." 박씨는 아버지 몰래 연습을 했다. 학교도 가지 않고 뒷산에서 피리를 불다가 아버지께 붙잡혀 돌팔매질도 당했다. 박씨 오른쪽 발등에는 아버지에게 돌로 맞은 상처 자국이 선명하다. "제가 17살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장지에서 '시나위'를 불어 드렸습니다. 아버지께서 자주 부시던 곡인데, 참 많이 울었습니다."
풀피리가 '밥'이 되진 않았다. 열여덟 살 되던 1966년 박씨는 무작정 고향인 전남 영암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목수 일을 배우고 기술을 익혀 건축업을 시작했다. 건축 경기가 좋아 돈도 잘 벌었다. 그래도 박씨는 매일 새벽 집 근처 공원에서 풀피리에 매달렸다. 저녁이면 자식들 공부에 방해될까 봐 이불을 뒤집어 쓰고 풀피리를 불었다. 주말엔 전국 산을 돌며 사람들에게 풀피리 소리를 들려줬다. "누구보다 산에 먼저 올라가서 산의 소리를 듣지요. 풀벌레며, 산새며 자연의 소리 그대로 머릿속에 기억하는 겁니다." 그 때의 영감(靈感)으로 노래도 몇 곡 작곡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1989년 박씨는 사비를 털어 첫 번째 앨범을 냈다.
문득, '대가(大家)'로 인정받고 싶었다. 서울시에 무형문화재 신청서만 7번을 냈고, 결국 2000년에야 '풀피리 무형문화재 1호'로 선정됐다. 나뭇잎이 무슨 악기가 되느냐며 비웃던 사람들에게 박씨는 고전에 적힌 증거자료를 내밀었다. "책을 뒤져보니 '악학궤범'에 풀피리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있고, 다른 문헌에도 '풀피리 악사가 궁중 진연(進宴)에 참가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무형문화재가 되고서 박씨는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그때부터 발표회와 연주회를 열고 대학 강단에도 섰다. 옛 CD도 마음에 안 들어 죄다 모아 폐기해버리고 다시 녹음했다. 5년 전 뜻 맞는 사람들과 함께 '광진국악관현악단'을 설립해 매년 정기공연도 연다. 지난 3월엔 미국 LA 공연도 다녀왔다.
제자도 가르친다. 민족사관고등학교 교사 김기종(金起慫·43)씨. 중앙대 대학원 국악과 출신인 김 교사는 무명시절 동네 장기자랑대회에서 박씨 솜씨를 알아보고 그 자리에서 제자가 된 사람이다. 지금은 풀피리 대를 잇는 전수장학보유자가 됐다. 초등학교만 나온 박씨 앞에 대학 나온 제자들이 무릎 꿇고 앉아 풀피리를 배운다.
"제자라고 해 봤자 10명도 안 돼요. '피 맛' 봐가며 숱하게 입술이 터져 굳은살이 박혀야 하는데, 다들 하루 이틀 배우고 나면 뭐가 이렇게 어렵냐며 돌아갑디다." 대학에서 장구를 전공한 아들은 풀피리는 배우지 않겠다고 했다. "내가 하도 불어대니까 듣기 싫었는지도 모르죠. 동네 사람이 시끄럽다고 경찰에 고발해 이사한 적도 있고…. 본인이 안 하겠다는 데 어떻게 해요."
대한민국을 벗어나 외국에서 공연도 하고, 그토록 소망하던 무형문화재가 된 지도 6년이 지났다. 또 다른 바람? "대한민국처럼 좋은 나뭇잎 많은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지막 바람이라면 전국 방방곡곡 풀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으면 좋겠습니다. 더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