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는 그 용어에 있어 근본적으로 일본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에 의해 한국에 야구가 도입됐지만 그 정착 과정에선 일본 야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패스트볼(fastball)을 '직구(直球)'라고 표기하는 것 자체가 일본의 영향이다. 과거에는 '낙차 큰 직구'라는 문구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나 마찬가지의 은유적인 의미였다. 간혹 공스피드가 형편 없이 느린 투수를 놀릴 때 쓰이곤 했다. 하지만 말그대로 직구란 똑바로 곧게 나아가는 공을 말하는 것이니, 일본에서 들여온 개념 대로라면 '낙차 큰 직구'는 현실세계에선 있어선 안 되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들어 메이저리그의 영향으로 '투심(two-seam) 패스트볼'이란 단어가 소개되면서 직구 개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패스트볼, 직구 표기 자체가 日 잔재
손가락이 실밥과 두군데에 걸쳐 만나도록 공을 잡고 던지는 투심패스트볼은 그야말로 '낙차가 있는 직구'다. 현재 박찬호(샌디에이고)가 주무기로 사용하고 있는데 일반 팬들도 중계화면을 통해 그의 투심패스트볼이 꿈틀거리며 왼쪽, 오른쪽으로 가라앉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뉴욕 양키스의 마리아노 리베라가 던지는 '컷(cut) 패스트볼' 개념까지 더해지면 그때부턴 진짜 구분이 모호해진다. 이후 '투심패스트볼'이란 단어를 기존의 '포심(four-seam) 패스트볼'을 일컫는 직구와 확실히 구분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애초에 패스트볼을 직구로 불렀기 때문에 생긴 어려움이다. 그러나 워낙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는 단어인 '직구'를 이제와서 다른 말로 바꾸는 것도 쉽지 않다.
▶일본 잔재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겟투→ 더블플레이, 포볼→ 볼넷으로 바뀌어
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한 뒤 출처 없는 일본식 조어를 바꾸려는 노력이 있었다. 야간경기를 일컫는 '나이트(night) 게임'을 '나이터(nighter)'라고 줄여부르던 버릇을 없앴다. '데드볼(dead ball)'을 '힛-바이-피치트 볼(hit-by-pitched ball)' 혹은 '몸에 맞는 볼'로 바꿔왔다. '랑데부(rendezvous)홈런'은 전형적인 국적불명의, 일본에서만 사용하는 용어였다. 초창기 한국프로야구에서도 차용해 썼지만 이후 '연속타자 홈런'이란 표현으로 바뀌었고, 최근에는 메이저리그 영향으로 '백투백(back-to-back) 홈런'으로 부르기도 한다. 어릴적 동네야구를 경험했다면 '언더베이스(on the base)'라는 용어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누상에 있던 주자가 같은 팀 타자의 외야플라이때 다음 베이스로 전진하는 걸 의미하는데 '언더베이스' 역시 일본식 표기다. 메이저리그에선 '태그업(tag-up)' 혹은 '리터치(retouch)'라고 표현한다. '포볼'은 '볼넷' 혹은 '베이스온볼스(base on balls)'로 쓰는 게 맞다. 현재까지 당연하게 쓰이고 있는 투수 관련 기록인 '방어율'도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일본식 용어다. 방어율은 투수의 자책점에 9를 곱한 뒤 이닝수로 나누어 계산한다. 실제 나오는 수치는 백분율이 아닌 9이닝당 평균자책점이다. 이 때문에 '방어율'을 '평균자책점'으로 고쳐 써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데 아직 완전한 결론이 나진 않은 상태다.
'겟투(get two)'를 기억하는가. 한때 더블플레이를 이렇게 부르기도 했는데 요즘은 더이상 들을 수 없다.
▶메이저리그의 영향
박찬호 영향 'QS''테이블세터'등 단어 활성화
박찬호 덕분에 기존 한국야구에는 없던 개념들이 차용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퀄리티 스타트(quality start)'다. 'QS'로 줄여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선발투수가 한경기서 6이닝 이상을 던지고 3자책점 이하를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박찬호가 LA 다저스에서 승승장구하던 99~2001년 사이에 국내팬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당시 박찬호가 등판할 때마다 QS를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팬들 사이에 혼란도 있었다. '6이닝 3자책점 보다는 9이닝 4자책점이 더 잘 던진 것 같은데 왜 그건 QS로 쳐주질 않는가'란 질문이 쏟아지기도 했다. 물론 그 경우는 QS 본래의 기준을 벗어나기 때문에 인정되지 않는다.
사실 매번 6이닝 3자책점을 기록하면 그 투수의 평균자책점은 4.50이 된다. 4.50이란 수치만 놓고 볼 때는 그다지 좋은 기록이 못 된다. 따라서 QS는 '적어도 이 정도면 팀타선이 역전할 수 있는 수준을 지켜냈다'는, 선발투수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치를 뜻하는 성격이 짙다. 물론 꾸준하게 QS를 기록한다면 현실적으로 좋은 투수임에는 분명하다.
최근 사퇴한 이순철 전 LG 감독이 2003년말 사령탑에 취임한 뒤 팬들과 인터넷으로 실시간 질의, 응답을 할 때였다. 몇몇 팬이 LG의 '테이블세터(table setter)'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당시만 해도 마니아 수준이 아니라면 잘 알아듣기 힘든 단어였다. 후일 이순철 감독은 "야, 팬들이 참 어려운 단어를 쓰더라"고 말했다. '밥상을 차리는 사람들', 즉 찬스를 만들어주는 1,2번 타자를 뜻하는 용어다. 이 역시 메이저리그에 익숙한 팬들이 많아지면서 이제는 자연스러워졌다.
중간계투진이란 말은 이제 잘 안 쓴다. '불펜(bull pen)'이란 단어가 구원투수들이 몸을 푸는 장소를 말하거나, 때론 구원투수 전체를 일컫는다는 것도 누구나 알게 됐다. 일전에 미국 언론에서 특정구단의 마운드 상황을 점검하며 ''Pen is mightier than~'이라는 제목을 뽑은 적이 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를 패러디한 이 제목이 결국 '선발진 보다 강한 불펜'이란 뜻이라는 걸 요즘은 어지간한 메이저리그 팬이라면 눈치 챈다.
(스포츠조선 김남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