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프랑크푸르트 시청사 앞 뢰머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정의의 여신상’이 연일 모습을 바꾸고 있다. 편견을 배제한 평등을 상징하는 저울을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정의집행의 엄격함을 뜻하는 칼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Justitia)’이다.

'정의의 여신상' 원래 모습

그러나 유스티치아상은 얼마 전에 오른손에 들고 있던 칼을 잃어버렸다. 지난 10일(현지시각) 잉글랜드 축구팬들이 파라과이전 승리를 자축하면서 여신에게서 칼을 뺏어간 것이다. 다음날 아침 여신은 어깨에 잉글랜드 국기를 숄처럼 걸치고 있으면서 오른손에는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다. 잉글랜드-파라과이전이 있던 날 여신상을 둘러싼 화단도 축구팬들에 의해 짓밟혀 원형을 잃었고, 쇠로 멋지게 장식한 난간도 여기저기 구부러졌다.

칼을 빼앗긴 '정의의 여신상'

한국 대(對) 토고전이 벌어진 13일(현지시각) 오후 7시쯤. 정의의 여신이 이번에는 오른손으로 태극기의 깃대를 들었다. 누군가 한국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태극기를 유스티치아의 오른손에 쥐어준 것이다. 태극기를 든 정의의 여신상을 중심으로 13일 밤 늦게까지 ‘오! 필승 코리아’의 응원구호가 뢰머광장에 끊이질 않았다. 적어도 3~4시간 동안, 정의의 여신은 ‘태극(太極)의 여신’이었다.

태극기를 손에 든 '정의의 여신상'

연일 수모 아닌 수모를 겪고 있는 정의의 여신상에 대해 프랑크푸르트 시청 측은 이렇다 할 공식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게 간접적으로 확인된 시청 측 입장이다. 시청의 의뢰를 받아 프랑크푸르트 시내 유적지 등을 외국인들에게 소개하는 전문 가이드인 옌스 페터 마이어씨는 "물론 칼을 가져간 것은 여신상을 훼손한 것이어서 문제가 있다"며 "그렇지만 우리 시청에서는 전 세계 축구 축제인 월드컵의 분위기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이 정도의 일쯤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독일 관공서도 월드컵 관련해서는 매우 관대한 셈이다.
/프랑크푸르트=박창신기자 heri@chosun.com, 촬영=최성민 CJ케이블넷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