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오수연과 동독 출신의 야콥 하인, 두 소설가는 하나의 경험을 공유하고, 두 개의 경험을 달리한다. 두 사람은 분단국가에서 자랐다. 한 작가는 공산체제에서 자라나 조국의 통일을 목격했고, 다른 작가는 자본주의 나라에서 태어났으며 조국은 여전히 분단상태다. 그들이 '젊은 작가에게 분단과 문학이 갖는 의미'를 주제로 마지막 이메일 대담을 나누었다.
▲오수연=독일 분단과 통일을 다룬 당신의 첫 소설 '나의 첫 번째 티셔츠'는 재미있는 일화와 유머로 채워져 있지만 슬픈 느낌을 준다. 10대 청소년인 소설 주인공에게 사회체제가 뒤바뀌는 경험은 충격이었을 것같다. 장벽이 무너질 때 당신도 10대(1971년생)였다.
▲야콥 하인=내 소설에서 슬픔을 찾아낸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다. 독일 평단은 내 소설을 몰락한 동독에 대한 해학으로만 받아들인다. 분단은 우리에게 '완료시제'이기 때문이다. 비극은 많이 잊혀졌고, 시간은 비극을 유머로 만들었다. 반면, 한국에서는 '진행'이기 때문에 당신은 작품에 드러나지 않은 슬픔을 본 것 같다. 당신의 시각 덕분에 내 소설의 의미가 더 풍성해졌다.
▲오=분단은 내게 껄끄러운 조건이다. 통일 자체로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평화로 가는 여정이란 의미를 부여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거창한 의욕이 인다. 그러나 분단문학이니, 통일문학이니 하는 조건이 붙은 문학 자체에 반발하는 마음도 생긴다. 그건 작가로서의 책임회피일까?
▲하인='주변의 현실'이란 것은 문학에 항상 어떤 역할을 해왔다. 전쟁과 고통이 가득한데 화려한 장미와 웃음짓는 아이들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 때 작가는 책임감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문학적 진정성을 획득하는 방법이 '현실'에만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오=분단과 전쟁의 경험을 다루더라도 그것이 문학이려면 아름다움과 품위를 복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문학은 "고통스럽다"는 하소연에 그쳐서는 안 되는, 문학 내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하인=내가 쓰고 싶은 것에 대한 자각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무엇을 읽고 싶어하는 지도 생각해야 한다. 붉게 피어나는 장미와 젊고 아름다운 남녀의 사랑에 대해 글을 써도 문학은 진지할 수 있다.
▲오=당신의 첫 소설은 통일을 다뤘고, 두 번째 책은 미국 체류 경험이며, 최근작은 암으로 사망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더라. 작가는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이야기를 끌어내지만, 당신에게는 특히 두드러진다.
▲하인=소설가는 고독의 방에 앉아 홀로 소설을 쓰지만 창문과 방문마저 닫을 수는 없다. 경험은 소설가의 자산이고, 창작물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를 반추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독일에서 작가들의 '낭독회'를 본 적이 있다. 당신이 '나의 첫 번째…'를 독서용이 아니라 낭독용으로 썼다는 사실이 놀랍다. 짧고 재치있는 문장, 일화 중심의 서술은 낭독을 위한 것인가? 독자와 소통하는 방법으로 당신은 낭독을 생각하는가?
▲하인=작가와 독자 사이에도 분단의 벽이 있다. 그것을 극복하려는 소통의 욕구가 너무 컸기 때문인지 나는 첫 작품을 낭송하고 독자 반응을 직접 본 뒤에야 출판할 용기를 얻었다. 베를린에서 1998년 시작한 낭독무대가 나를 작가로 만든 셈이다. 신작을 낭독하면 독자들은 맥주를 마시면서도 진지하게 경청한다. 게다가 그들은 오랜 문학 애호가들이 아니라 문학을 새로 접하는 젊은 독자들이다. 그들은, 문학이 효과적인 소통 방법을 찾는데 성공한다면 미래에도 독자를 잃지 않는다는 확신을 내게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