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서장원기자 jwseo@chosun.com

'100년이 지났다. 우리는 아직 고도(Godot)를 기다리고 있다.'

이마에 팬 굵은 주름. 꽉 다문 입술. 회색빛 얼굴의 흑백 사진이 눈에 띄었다. 아일랜드 더블린 공항 통로를 지날 때 가장 먼저 반겨줬던 대형 포스터의 주인공.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였다. 베케트 탄생 100년을 기념하기 위해 아일랜드에선 25개 공연·문화 단체가 손을 잡고 65개의 이벤트를 꾸몄다. 총괄기획자 로라 반즈는 "그의 고독과 외로움, 묘한 유쾌함을 맛보기엔 더 없는 발견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아일랜드 '심장' 더블린은 조용하지만 힘찬 펌프질을 하고 있었다.

'Esse means to breath.(존재는 숨쉬는 것이다.)'

더블린 시내 중심부에서 다소 떨어진 트리니티 칼리지. 그가 지식의 탑을 쌓은 곳이다. 눈길을 사로잡은 건 도서관 2층 '긴 방(Long room)'에 마련된 베케트 원고 전시회. 이곳에서 가장 먼저 발견한 말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스치게 하는 이 문구는 그가 가장 즐겨 썼던 말이라고.

직접 영어로 번역한 '고도를 기다리며'(처음엔 프랑스어로 썼다) 원고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들도 보였다. 방을 메운 관광객과 학생들은 그의 말을 받아 적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파리에서 왔다는 주네브 맥거브너씨는 "그가 꼭 눈 앞에서 글을 쓰는 듯한 느낌"이라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마음의 보물이 됐다"고 밝혔다.

'No matter.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 ter.'(어찌됐든 다시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고. 실패도 나아질 것이다.)―그의 작품 Worstward Ho 중.

대학내 상점에서 팔고 있는 베케트 엽서에 적혀 있는 말이었다. 이 역시 그가 좋아했던 문구 중 하나. 아일랜드로 떠나기 전날에는 런던 바비칸 센터에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만났다. 이번 백주년 기념 행사는 런던과 아일랜드가 손을 잡고 기획한 야심 프로젝트. 의미 없는 몸짓, 과장된 말투, 결과 없는 기다림이 이어졌다. 그냥 억지 같은데, 이상하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배우들이 내던지는 말은 다소 이해하기 힘들었고, 상황은 역시나 설명이 안됐다. 해 볼만한 실패였다.

'Ochon, Ochon, Dead but not gone.'(죽지만 사라지지 않아)

베케트가 죽기 5년 전부터 만나 단짝이 된 마이클 콜건. 아일랜드 문화의 상징 게이트 극장(Gate theatre)의 총책임자이기도 하다. 1991년 베케트의 희곡 작품 19개 전작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6일 'Eh Joe'를 시작으로 서막이 열렸다. 콜건은 축사에서 "그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숨쉴 것"이라고 운을 뗐다. "항상 유머를 잃지 않고, 보이지 않게 남을 돌보는 착한 사내였다"고 덧붙였다. 베케트는 죽기 얼마 전, "자네, 내가 넘어지거든 말이지 일으킬 생각은 하지 말게. 죽지만, 사라지지는 않아"라며 담담히 웃었다고 한다.

막이 올랐다. 호흡이 시작됐다. 100년이 지났다. 고도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호흡하고 있다. 존재하는 한, 고도를 기다릴 것이다.




(더블린=최보윤특파원 spica@chosun.com)

명대사 베스트5

▲"무덤에 걸터앉은 채 태어나면, 순간적으로 빛이 잠깐 스치고, 곧 다시 밤이 되지."(고도를 기다리며)

삶의 순간은 마치 무덤 옆에서 태어나는 것 같은 찰나이면서, 동시에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메시지. 인간의 근원적 한계성을 말하고 있다. 여인의 자궁에서 태어난 인생이 대지의 자궁으로 되돌아가는(womb▲tomb) 삶의 모순적인 두 조건. 태어남과 죽음이다.

▲"신은 증언대에서 맹세할 수 없는 증인이다."(와트)

우리는 신의 이름으로 많은 것을 맹세하지만 그는 우리의 결백을 증언해주지 않는다. 신이 우리를 구원해 줄 거라 믿지만 신은 우리가 원하는 곳에 나타나지도 않고 침묵한다는 것.

▲"내가 죽었다면, 내가 죽었다는 것을 나는 모를 것이다. 그것이 내가 죽음을 거부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난 죽음을 즐기고 싶다."(엘뢰테리아)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은 살아 있기에 가능하다. 이미 죽음 그 자체는 죽음을 이야기 할수 있는 것조차 부정당하는, 무(無)의 현상이고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 실수들이 내 인생이다."(일에 따라)

태어나지 않는 게 가장 축복받은 것이라는 베케트의 기본 철학과 맞물리는 대사. 되풀이되는 실수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게 우리 인생이다.

▲"아마도 내 전성기는 지나간 것인지도 모른다. 행복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만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아."(크랩의 마지막 테이프)

69번째 생일을 맞은 크랩이 39세 생일에 녹음해 놓은 과거를 테이프로 재생시키며 하는 말이다. 시간 밖 영원에 도달하고 싶은 욕망. 한 번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삶에 대한.

(송혜숙·서울예대 교수·베케트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