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혜숙 교수

해럴드 핀터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를 희극적으로 극대화한 극작가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베케트 이후 최고의 부조리 극작가로 꼽힌다. 한국 관객에겐 '티 타임의 정사' '덤웨이터' 등이 잘 알려져 있다.

노벨 문학상이 핀터를 호명한 건 근래 되풀이되고 있는 테러·전쟁 같은 시대적 상황과도 관련된 것 같다. 우리는 안전하다고 믿을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서로 위협하고 불신하고 있지 않은가.

1958년 '생일파티'가 호평받으며 기대주로 주목받은 그는 엉뚱한 사람이 주인행세를 하는 '관리인'(1960)으로 세계적인 작가의 자리를 굳혔다.

작가이자 배우이자 연출가였고, 시나리오와 라디오 대본까지 쓸 정도로 재능이 많았다. 불륜의 삼각관계를 다룬 '배신' 등 자신의 작품을 직접 연출하기도 했지만 작가로서만큼의 평은 받지 못했다.

'핀터 페스티벌'서 공연된 연극 '배신'

핀터는 "가장 존경하는 작가는 베케트이며 그가 내 스승"이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부조리 작가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언어적 유희에 치중했다는 게 그가 베케트와 다른 점이다. 베케트는 막연한 기다림을 인간의 희극적 상황으로 풀었다. 반면 핀터의 작품에선 늘 밖으로부터 어떤 불가항력의 위협이 침투해 들어온다. 그럼에도 내부에 갇힌 사람들은 저희들끼리 불신한다. 두 남자가 갑자기 하숙집에 나타나 아무 이유없이 집주인과 말다툼을 벌이는 '생일파티'도 그렇고 청부살인자들끼리 다투는 '덤 웨이터'도 마찬가지다.

말의 비틀기와 유머감각으로 영국의 희극 전통을 현대적으로 되살렸다는 게 극작가로서 그의 진경이다. 이런 그의 스타일은 그의 이름을 딴 '핀터레스크'라는 용어까지 낳았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거나 전혀 다른 의미로 희화화하는 것을 말한다. 성격이나 동기를 대담하게 무시한 작풍으로 연극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서울예대·연극과 송혜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