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규(문래중 1)의 얼굴이 발개졌다. 평소 축구하느라 햇볕에 붉게 탄 것과는 좀 다른 '홍조'다.

"좀 있으면 과외 시작하거든요. 제일 기다려져요. 효과요? 저 이번 중간고사에서 영어 100점 맞았잖아요. 우리반에 3명밖에 없는데~. 수학도 80점 넘어서 제가 축구부에서 1등 먹었어요." 축구부 숙소에서 운동장을 지나 멀티미디어 강의실까지 한달음이다. 7교시 정규수업을 마치고, 한 시간 넘게 뛴 저녁 훈련에 고될 만도 한데 피곤한 기색은 없다.

강의실엔 민규 같은 아이들이 올망졸망 앉았다. 빨간색 축구 유니폼에, 강의실이 떠나갈 듯 큰 목소리. 붉은 악마 응원단처럼 활기차다.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과외를 받는 학생들은 이 학교 축구부 1학년 18명. 일주일에 세 번(월·수·금), 두 시간씩 대학생 누나 선생님으로부터 국어와 영어, 수학을 배운다. 수업을 다 받고도, 훈련 때문에 학과 성적이 뒤처질까봐 올 초부터 시작한 보충수업이다. 과외비는 학교에서 대준다.

2, 3학년은 과외 대신 정규 수업에 더 집중한다. 김태인 코치는 "젊은 코치들이 많아지면서 공부도 함께 가르치는 게 트렌드"라며 "대회 중에도 친구 노트를 복사해 틈틈이 공부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강조했다. '축구 성적'도 높다. 최근 몇 년 사이 전국 대회 우승을 여러 차례 거머쥐었고, 올해 서울시 교육감배와 오룡기 전국대회에서 각각 3위를 했다.

학교 수업을 전부 듣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축구로 대학엘 가야 하는데, 공부한다고 시간 뺏겨서 운동 성적 나쁘면 책임질 거냐"는 학부모의 반대도 있었고, 일부 교사들도 "학습 분위기 나빠진다"며 말렸다고 한다.

하긴 예전엔 교실 뒤편에 누워 있거나, 아무 때나 나가버리고, 반평균을 까먹던 학생들이 축구부원들이었으니까. 이제 그런 모습은 찾기 힘들다. 학생들의 성적은 예년에 비해 평균 30~40점이 올랐고, 수업 태도도 더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운동부'라 낯설고 서먹서먹하던 다른 친구들과의 거리감 역시 많이 줄었다.

문래중뿐만이 아니다. 금천구 문일중, 동작구 중대부중, 송파구 신천중, 구로구 구로중, 은평구 구산중, 양천구 목동중 등 축구팀이 있는 서울시 42개 학교 중 절반 이상에서 선수들이 정규 수업을 받고 있으며, 지방에서도 적지 않은 학교가 동참하고 있다.

'축구 특목고'를 표방한 용인시축구센터와 최근 무학기 중고축구대회 준우승팀인 경기도 시흥시 정왕중학교, 경남 마산시 마산중앙중을 비롯, 경남 밀양시 밀성중, 광주 서구 상일중 등 전국 30~40개 학교가 선수들에게 영어와 한문을 별도로 가르치고 있다. 포항 포철중 선수들은 프로팀인 포항 스틸러스의 영어 통역관에게서 회화를 배우고, 전남 광양제철중도 프로팀의 코칭스태프로부터 숙제검사와 예습지도를 받는다.

이 같은 현상은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나타났다. 축구 위상이 높아지고, 클럽축구가 활성화되면서 '운동선수도 공부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의식이 넓게 퍼졌다. 대한축구협회에 등록된 초등학교 남자팀은 279개인 데 비해, 대학교는 68개, 프로팀은 13개로 급격히 줄기 때문에 운동으로 성공하지 못할 경우 공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2의 인생'을 설계하기가 어려워진다. 세종대 이용수 교수는 "전국대회 성적에 목을 매는 현 제도를 뜯어고쳐 지역·연령별 리그를 대대적으로 시행해야 한다"며 "학생 선수들이 정규 수업시간에 운동하지 못하도록 협회차원에서 막는 등 다양한 방식을 택해 어린 싹을 보호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협회도 학원축구의 주말 리그제를 정착시키고 4강·8강제로 이뤄진 축구 특기자 진학제도를 개선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학원(중·고·대)팀은 1년에 세 번만 전국대회에 나갈 수 있도록 제한했다. 방학 때만 유소년 리그를 여는 일본과 비교하면 걸음마 단계지만 한 걸음씩 선진화되고 있다는 증거다.

과외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가 복습까지 한 민규는 다시 운동화끈을 조여맸다. 밤이 늦어가지만 이제 시작이라고 한다. "아직 전국대회 그라운드를 못 밟았거든요. 축구도, 공부도 둘 다 재밌어서 포기할 수 없어요. 지금부터는 축구 복습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