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들의 현란한 몸 동작이 가사와 멜로디를 집어 삼켜버리는 댄스음악 '홍수' 속에서도 나이 든 시청자들은 '찔레꽃', '눈물 젖은 두만강' 같은 오래된 노래들을 브라운관에서 만날 수 있어 감회에 젖는다.
KBS 1TV '가요무대'(월요일 밤 10시)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난 1985년 첫발을 뗀 이 프로그램이 내달 8일 900회를 맞는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것이다.
칠순을 넘긴 김강섭(71·사진) KBS 관현악단 객원지휘자는 그런 '가요무대' 녹화를 출범 당시부터 지금까지 19년간 이끌어 온 숨은 공신. 25일 오후에 만난 그는 발그레한 혈색의 건강한 얼굴로 "너무 오래해서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기성가수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으로는 아마 가장 오래됐을 겁니다. 즐겨보는 시청자들이 많고 대중들이 좋아하니까 가능한 일이죠. 저요? 우리 팀장이 내쫓을 때까지는 계속할 겁니다. 허허."
20세 되던 1953년부터 10~12명으로 구성된 자신의 악단을 이끌고 미8군 무대를 누볐던 그는 61년 KBS에 입사, 관현악단장으로 34년을 보냈다. 95년 정년퇴임 후에도 '가요무대'만은 떠날 수 없다며 매주 한 차례 6시간 이상을 KBS 공개홀에서 보내며 왕성한 열정으로 악단을 지휘하고 있다.
제작진은 그가 없으면 난감한 처지다. 서태룡 PD는 "'가요무대'에서 지휘를 하려면 전통가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되는데 지금 김 단장님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가요무대'에서 부르는 노래 중 상당수는 김강섭씨 본인이 직접 작·편곡한 것들. 그는 자신의 대표작으로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 '그 얼굴에 햇살을', '나의 노래' 등을 꼽았다.
"가수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게 제일 즐겁지요. 패티김, 나훈아, 최희준…. 어렸을 때부터 줄곧 지켜봤어요. 특히 최희준은 제가 미8군 무대에 데뷔시켜줬지요. 대학 1학년이던 그 친구 '서울 법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냇 킹 콜 노래를 부르는 걸 봤는데 아주 잘하더라구."
그는 "요즘 가수들은 연습을 제대로 안 하는 것 같다"며 "어떤 가수는 '가요무대'에서 옛날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노래방에서 몇 번 연습하고 오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얼마 전, 한 젊은 가수가 제가 편곡한 노래를 부르는데 멜로디와 코드가 다 틀리더라구요. 일일이 지적해서 고쳐주는데 말을 안 들어서 환장하겠더군요. 결국 벌컥 소리를 지르고 말았어요."
트로트에 대한 애정도 뜨거웠다. "트로트는 리듬의 일종인데 원래는 미국에서 온 거죠. 그런데 집권층에서 한때 왜색이 짙다는 명목으로 일부 트로트 가요를 금지시켰던 적이 있어요. 일본 전문가들은 '엔카의 원류는 한국'이라고들 하는데 말이 안 되죠. 자극적인 비트에 실린 요즘 노래들은 트로트와 비교해 보면 가사와 멜로디를 도대체 음미할 수가 없어요." 그런 그가 꼽는 가장 노래 잘 하는 가수는 정훈희였다.
8일 방송될 '가요무대' 900회 특집방송에서는, 이 프로그램에 가장 많이 출연한 주현미(388회)를 비롯, 전미경, 설운도, 송대관, 하춘화, 문희옥 등이 등장한다. 그간 '가요무대'를 거쳐간 가요는 1만5000여곡, 방청객은 50만여명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