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7박8일 다녀온 얘기를 하겠다. 나는 재팬 파운데이션(일본문화재단)이라는 일본 정부의 기관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지난주 일본을 공식 방문했었다. 그쪽에서는 나를 한국을 대표하는 일류 문화인으로, 특히 일본에 우호적인 인물로 판단해서 모종에 감사의 표시를 한다는 의미인 듯 했다.

그러니까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나는 KBS의 '조영남이 만난 사람'을 일본에 가서 찍으며 마침 16강과 8강에 오른 한국의 경기를 일본에서 봐야 했다. 그때 나는 참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많은 일본 청년들이 한국 축구를 일방적으로 응원하는 것이었다. 하도 이상해서 나는 몇 번이고 그곳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확인했다. 많은 일본 청년들이 그냥 한국을 응원하는 것이 내 눈엔 너무도 신기해서 한국에 돌아와 중앙일보 조영남의 '삶과 문화' 칼럼에 내가 본 대로 그 얘길 쓰고 나는 '진담 반 농담 반'으로 그 경험 때문에 내 자신이 친일파가 되었음을 선언했었다.

반대의 경우였다면 우리가 과연 그렇게 일본을 응원했을까.

그리고 무심코 2년이 흐른 다음 나는 뜻밖에 일본으로부터 초청의사를 타진받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바로 코앞에 '광주 비엔날레'와 10월 초 '조영남 데뷔 35주년 기념 비공식 은퇴 공연'을 앞두고 허겁지겁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본을 둘러보게 된 것이다.

일본의 여러 미술관과 NHK, 아사히 TV 스테이션을 찾았고, 토크쇼 사회자 초난강, 영화 '호텔 비너스'의 감독 다카하, '겨울연가'를 일본에 퍼뜨린 일본 PD, 그리고 필름 수입업자 이봉우, 일본 현지에서 맹위를 떨치는 우리의 나훈아씨 등등 정신없이 만나면서 맨 마지막날 나는 센다이로 기차를 타고 달려갔다. 단 한 명의 일본 여인을 위한 프라이빗(?) 콘서트를 열기 위해서였다.

사연을 짧게 얘기하자면 10여년 전부터 일본의 한 여자가 내가 공연하는 장소에 빠지지 않고 나타난다는 것을 그녀의 지인을 통해 몇년 후 알게 되었는데 실제 만나고 보니 흔한 스토커가 천만에 아니고 진정으로 조영남을 좋아하는 일본 여인, 시집을 한번도 안 가고 40여년을 살아온 여인이었다. 그래서 '한국 오빠', '일본 동생'이 되었고, 그녀는 한국말을 배우고 나는 '예수의 샅바를 잡다'를 번역하기에 이르렀다.

하여간 나는 일본에 간 김에 가모 요시코에게 전화를 걸어 "너 있는 쪽으로 가서 너 한 사람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했더니 일본 여동생은 깜빡 죽어 넘어갔다. 내가 벌써 10년째 맨 날 한번 간다하면서 차일피일해왔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 한 사람이 150배로 불어나 일본인 관객을 상대로 소규모 콘서트를 하게 되었는데 공연 중간에 신청곡을 받겠다고 했더니 '선구자'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요시코의 친구들은 이미 나의 CD 한 장씩을 가지고 있는 상태라 나에 대한 정보가 꽤 있는 듯 했다. 그래서 '선구자'를 부르려고 피아노로 전주 부분을 치기 시작했는데, 어라? 이게 일본군에 대항해서 죽기 살기로 싸웠던 우리의 독립투사들을 기리는 노래가 아니던가? 그런 노래를 일본인들 앞에서 불러야 하는 운명의 장난이라니. 나는 통역을 앞세워 정확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침착하게 노래를 불렀다. 35년 가수생활에 이런 미묘한 분위기는 첨이다.

물론 박수갈채가 터졌다. 이것이 바로 문화교류였다. 나는 내 스스로 한일 우호관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말 그대로 선각자, 선구자 된 듯한 느낌이 피식 들었다. 세상엔 별 일이 다 많다. 그래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P.S. 의사가 나를 진단했다. 시한부 인생이라고. 앞으로 잘 살아야 40년, 50년 이란다. ㅋㅋㅋ

(가수 조영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