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적은 결국 부패한 사회가 만들어낸다. 사회 자체가 거대한 억압의 시스템으로 구성원을 옥죌 때 차라리 사람들은 시스템의 결함 속을 누비고 다니는 대도(大盜)에게 열광하는 쪽을 택한다. 19세기 후반 호주를 무대로 한 ‘네드 켈리’(Ned Kelly·16일 개봉)에서 극의 배경이 되는 것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호주로 이식된 지난(至難)한 아일랜드 이민의 역사다.
아일랜드계 빈민 가정의 장남인 네드 켈리(히스 레저)는 사이가 좋지 않던 경찰의 모함으로 살인 미수 누명을 쓰게 된다. 이후 숲에서 벌인 총격전에서 네드 일행은 뜻하지 않게 경찰들을 사살하고 도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은행까지 털게 된다. 영국 여왕은 네드에게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영국 본토에서 직접 헤어 총경(제프리 러시)을 파견하지만, 민중들은 네드를 영웅적 존재로 떠받든다.
‘네드 켈리’에는 탄환 발사 후 재장전에 시간이 걸렸던 당시 총기들의 특성에 기반한 총격전이 희귀한 볼거리로 등장한다. 네드가 상류층 유부녀인 줄리아(나오미 와츠)와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나눈다는 설정도 나온다. 경찰의 포위망 속에서 굶주린 네드 일행이 말을 죽여 피를 마시는 비장한 장면도 들어 있다. 이야기 흐름과 상관없이 종종 롱샷(멀리찍기)과 클로즈업을 번갈아가며 갖가지 자연 풍광을 인상적으로 펼쳐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요소들을 한데 품고 있는 이 작품은 정작 물 탄 콜라를 마시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호쾌한 영웅서사극도, 그렇다고 영웅서사의 관성에 저항하는 반(反)영웅 사극도 아닌 이 영화는 시종 실화의 무게에 질질 끌려다닌 끝에 이렇다 할 구심점 하나 찍지 못했다. 절절한 사랑에서 계급의 문제까지를 흥미롭게 다룰 수 있었던 줄리아와의 로맨스도 중반에 들어서면서 흐지부지되어 왜 끼워넣었는지조차 납득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네드에게 팽팽히 맞서는 강력한 캐릭터를 선보일 것 같았던 연기파 제프리 러시조차도 잔뜩 늘어진 극의 구조 속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영화는 “이게 인생이다”라는 마지막 내레이션으로 장엄하게 끝맺으려 하지만, 정말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