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말 풍운의 회돌이가 풀무처럼 일어나는 난세에 영웅 호걸이 명멸하는 동안, 가장 잔잔하고 아름다운 삽화는 관운장(關雲長)과 조조(曹操)의 운명적인 만남이 아닐까 한다. 삼국지연의에 무수한 등장인물이 있지만 나관중은 그 두 영웅의 만남에만 소설의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며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조조의 심정은 유비의 삼고초려에 비할 바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일찍이 유비(劉備)가 곤궁하여 세 형제가 뿔뿔이 헤어져 서로 생사를 모를 때, 관운장은 두 형수를 난세 속에 버려둔 채 죽는다면 유비의 부탁을 저버린다고 생각하고 잠시 조조에게 항복하여 몸을 의탁하고 유비의 처소를 아는 즉시 떠나기로 조건을 세운다. 조조는 관운장을 흠모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온갖 예의를 갖춘다. 미녀 열 명을 보내어 관운장을 모시게 하고, 배 아래까지 드리워진 수염을 보호하는 비단 주머니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리고 여포가 생전에 탔던, 온몸이 불꽃처럼 붉고 매우 웅건한 적토마(赤兎馬)의 고삐를 관운장의 손에 쥐어준다.

관운장이 처음으로 절하며 깊이 감사하자 그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묻는다. “아름다운 여자와 황금과 비단을 여러 번 보내줬건만, 귀공은 한 번도 나에게 절을 한 일이 없소. 이제 말을 받고서 두 번이나 절하고 기뻐하니 어째서 말을 더 귀중히 생각하시오.” 관운장이 답하기를, “저는 이 적토마가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것을 압니다. 이제 형님(유비)이 어디 계신지를 알게 되면 단 하루 만에 가서 뵐 수 있습니다.” 조조는 아연실색하고 탄식하며 크게 후회한다. 관운장은 그의 휘하에서 원소의 천하 맹장 안량·문추를 목베어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는다. 이에 조조는 관운장을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하게 하고 관인(官印)까지 만들어 준다.

이렇듯 간절하고 애틋하게 달래지만 관운장의 충의(忠義)는 일편단심 유비에게만 향해 있다. 관운장은 어려서부터 책을 읽어 의리는 자기 마음을 저버리지 않으며, 충성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마침내 유비의 거처를 알자 관운장은 조조의 곁을 떠난다. 조조가 하직 인사를 회피하자 편지로 대신한다. 그는 적토마 외에 조조한테서 받은 일체를 일일이 봉하여 곳간에 두고 관인까지 방벽에 걸어두고 두 형수를 모시고 떠난다. 얼마를 갔을 때, 조조는 전송하러 말을 타고 달려온다. “비단 전포(戰袍) 한 벌을 선물하니 나의 간곡한 정표를 사양치 마시오.” 관운장은 주위를 경계하며 말에서 내리지 않고 감히 청룡도 끝으로 비단 전포를 끌어올려 몸에 걸쳐 입는다.

여기서 나는 두 영웅을 똑같이 사랑한다. 전혀 다른 길을 각각 걷는 두 사람은 영원히 만날 수 없다. 그동안 두 사람 모두 초조하였으되 그리움의 방향이 달랐다.

이 소설에서 관운장과 조조의 만남이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을 통해 관운장의 인격뿐만 아니라 그의 모습이 완벽하게 갖추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얼굴이 대춧빛처럼 검붉고 수염이 배 밑까지 엄청나게 길고 입술은 연지를 바른 듯 빨갛고 봉황의 눈에 누에 같은 눈썹을 지니고, 청룡도를 비스듬히 잡고 적토마를 타고 있는 9척 장신의 당당하고 근엄한 모습들이 하나하나 추가되어 완성되면서 우리 뇌리에 새겨지게 된다. 이로부터 그의 모습만 보고도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낀다. 완벽한 관운장의 탄생이다.

그 늠름한 모습은 죽은 후 군신(軍神)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널리 모든 한족(漢族)에 침투하였고 곳곳에 관제묘(關帝廟)를 짓고 초상을 그려 제사 지내며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끼쳤다. 관운장의 충의(忠義)를 널리 밝히려고 ‘삼국지연의(演義)’라 하였던가. 등장인물 중에 충의의 화신(化身)으로 마침내 오직 그만이 신앙의 대상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나관중의 소망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는 관운장의 의(義)를 밝히려고(演) 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위대한 스타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姜友邦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