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뮤지컬 '신데렐라'를 공연 중인 서울 대학로의 한 소극장.
왕자님의 무도회 장면이 시작되자 신하 역을 맡은 한 여배우가 노란
파티복을 입고 나왔다. 그런데 그의 입술은 움직였지만 입에선 단 한
마디의 대사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두 손이 바쁘게 움직이며
수화(手話)를 했다. 제대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청각장애인 배우
이재란 (20)씨. 그러나 그의 연기 속에는 일반 연기자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진지함이 물씬물씬 배어났다. 이씨의 수화 연기를 옆에 선 다른
배우가 통역을 한다. "오늘밤 무도회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왕자님께서는 참석하신 아가씨들과 춤을 추고,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아가씨와 결혼할 겁니다. 여러분에게 행운을 빕니다."
이씨는 손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손의 리듬에 맞춰 온몸을 춤 추듯
움직인다. 수화와 무용을 합친 독특한 동작이 여느 베테랑 배우 못지
않게 유연하다. 수화 연기를 통역하는 다른 배우가 그의 곁에 없더라도
대사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그는 온몸으로 연기를 하고 있다.
객석에서는 "말을 못하는 거야?"라며 뜻밖이라는 표정들. 하지만
이씨의 온몸 연기가 끝나면 어김없이 박수가 쏟아진다.
공연 후반부, 왕자님이 신데렐라를 찾아 나서는 장면에서도 이씨는
유리구두 한 짝을 들고 등장해 객석을 돌아다닌다. 관객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며 주인을 찾는 모습에선 그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기
어렵다.
'신데렐라'가 지난달 하순 대학로 창조콘서트홀에서 10일 동안 공연할
때 이씨는 전체 20회 중 5회에만 출연했다. 하지만 이달 2~10일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연장 공연을 하면서 이씨는 매일 2회 공연 중
1회씩 빠지지 않고 출연하고 있다. 22일부터 5월5일까지 같은 장소에서
하는 앙코르 공연에도 매일 출연하게 됐다. 관객들이 예약을 할 때
"이재란씨가 나오는 날 보겠다"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씨는 농아들로 구성된 '주사랑 농아교회 예술단'의 단원이다.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지만 그의 꿈은 '뮤지컬 스타'다. 초·중·고교
과정의 서울농학교를 졸업한 뒤 혼자 인터넷을 뒤져 이 농아예술단을
찾아내 입단했고, 춤 학원을 다니며 꿈을 키우고 있다. 하지만
농아예술단이 아닌 일반 프로 뮤지컬무대에 서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일반 배우들과 함께 무대에 서는 게 너무 신난다"고 수화로
말하며 좋아 죽겠다는 듯 주먹을 꼭 쥔 채로 박수를 쳐댔다. 이씨와의
인터뷰는 수화 통역자의 도움을 받으며 이어졌다.
"저는 춤이랑 노래가 너무 좋아요. TV에서 가수들이 노래하는 걸 보면
다 따라할 수 있어요. 멜로디랑 가사는 안 들려도 박자는 느낄 수
있거든요."
"좋아하는 가요도 많다"는 그는 "좋아하는 노래가 뭐냐?"고 묻자
수화로 답하기 힘들었는지 직접 종이에 적어 준다. "SES의 '러브',
핑클의 '영원한 사랑'을 제일 좋아해요."
이씨는 만 두 살 때 열병을 앓은 뒤 청각 기능을 잃었다. 보청기의
도움을 받아 큰 울림소리 정도를 감지할 수 있는 2급 청각장애인이다.
하지만 그는 학창 시절 줄곧 자타가 인정하는 '끼 많은 소녀'였다.
특히 박자감각이 생명인 '탭댄스'가 그의 특기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 자원봉사하러 온 선생님한테 탭댄스를 처음
배웠어요. 선생님이 저한테 춤 소질이 있다고 하셨어요. 저는 꼭 유명한
뮤지컬배우가 될 거예요. 대사 없이 연기하는 마임배우도 있는데
뮤지컬에도 그런 배우가 있지 않겠어요? 저한테도 기회가 올 거예요."
쉬지 않고 꿈 얘기하는 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뮤지컬 스타'는
그냥 막연한 '꿈'이 아니라 확신에 찬 '목표'였다.
6녀1남의 막내딸인 이씨는 용돈을 100% 스스로 벌어 쓴다. 종로 KFC에서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고 한 달에 40만~50만원을 번다. 보청기
할부금 20만원, 탭댄스 학원비 10만원을 내고 나면 10만원 남짓 남는다.
그걸로 한 달 용돈이 되느냐고 묻자 종이에다 "장애인은 지하철이
무료잖아요. ^_^ "라고 썼다.
그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기다릴 때에도 발을 두드리면서 탭댄스 연습을
한다"고 했다. "아주 가끔, 나는 왜 말을 못할까, 답답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신발을 딱딱 두드리면서 춤을 춰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지는 않지만, 경쾌한 박자는 분명히 몸으로 느껴져요. 그러면 답답한
게 확 풀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