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에서 2003년으로 넘어오면서 우리 사회의 화두 1위는
'세대'였다. 그 격차는 갈등요인이면서 동시에 발전동력이었다.
오늘의 구체적인 실상이 궁금했다. 가장 기본적인 '세대간(世代間)'일
부모와 자식 사이를 한 쌍씩 찾아가 현장을 스케치한다. (편집자주)
“엄마는 ‘잔소리의 여왕’이에요.”
“야 인석아, 이것도 고생이라고 하니?”
원로 언론인이자 작가인 피터현(76)씨와 막내아들 현민기(25)씨가 22일
저녁 포장마차에 마주앉았다. 아들의 소주잔 비워지는 속도가 아버지보다
2배 정도 빠르다. 아버지에게 요즘 아들의 생각을 아느냐고 묻는다.
“몰라. 완전 미지수야.” “나도 아빠를 그렇게 생각해요.”
파고다공원 옆. 분위기는 화기애애한데 얘기는 겉돈다.
"졸업장 같은 형식적인 학력이 중요하지는 않겠지. 그러나 네가 교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 거지 같은 졸업장은 필요한 게 아니냐? 네가 원하는,
고등학교 영어선생을 하려면 말이다."
민기는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뉴욕의 사립 트리니티 스쿨에서
중·고교를 마쳤으나 대학은 메인주의 베이츠 칼리지, 뉴욕주립대인
스토니 브루크를 중퇴했다. 교수와 뜻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민기는 수녀 시인 이해인을 좋아해 그의 시를 번역하고 있고,
고교시절부터 시 번역으로 굵직한 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종로2가의
영어교재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장래 꿈도 시와 더불어 사는
작가가 되는 것이다. 작가인 아버지와 '같은 길'이다. 그러나
'생각'만큼은 전혀 '다른 길'이다.
"아버지 세대는 굶으면서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것을 로맨틱하게
생각했어요. 저는 예술가가 그렇게 산다는 게 안 맞고, 꼭 그렇게 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뉴욕에서 부잣집 아이들이 예술한답시고 일부러 가난하게 지내는 것을
그는 '개멋'이라고 욕한다. 민기는 피터현의 늦둥이다. 친구의 아빠도
자신의 아빠에겐 아들뻘이다. 그렇지만, 친구보다 말이 더 잘 통하는
부분도 있다.
"아빠의 책을 읽어보면 나한테 말로 해준 것보다 더 정직해요. 어릴 때
성인잡지를 몰래 볼 때처럼 두려워요. 아빠는 자서전에 다른 여자와
오입한 얘기도 썼더라고요. 심각한 것을 농담처럼 얘기하는 그런 심정이
읽혀져요. 아빠의 말은 마치 퍼즐처럼 내게 딱 맞아떨어져요."
아버지는 아일랜드 여행 때 아들에게 부쳐준 세이머스 히니의 시집 3권이
아들의 인생을 바꿔 놓은 것에 대해 후회스러운 말을 던진다. 물론
농담투다.
"시집을 안 보냈으면 네가 은행가가 됐겠구나." "그럴수도요." "돈
많이 벌고, 지금 내게 용돈도 주고, 여자도 사주고…." "오우 스톱!
엄마 있잖아요." "바보 같은 놈."
그러면서 둘은 자꾸 잔을 부딪친다. 부자지간의 닮은 점을 묻자 겉돌던
얘기가 돌변, 변죽이 척척 맞는다.
"닮은 점? 전혀 없어. 아, 있다. 선생에 대한 반항심, 신경질!"
"그렇죠, 상대가 내 말을 이해 못하면 바로 화내는 것, 싫은 일은 절대
안 하는 것, 성격 급하고, 소리 지르고, 고집 세고, 섹스 농담 좋아하고,
손 작고 얼굴 넓적하고…. 그런데 아빠는 여자 관계가 많은데 저는 별로
없어요." "내가 뭐 여자가 많아? 다 옛날 얘기지." "죄송함~다."
아들은 십수 년 전 미국으로 유학 떠날 때 김포공항에 환송 나온 친척
모두에게 포옹인사를 했으나 아버지를 외면했던 기억을 말하면서
울먹울먹한다.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하고 싶은 일을 못했다는 것을
이해하는 지금은 다르기 때문이다.
"자식으로서 미안하죠. 아빠는 나 때문에 포기했거든요. 글 쓰는 것,
독립적으로 사는 것, 자유롭게 사는 것." "얌마, 네가 태어난 것이 왜
네 탓이야? 그리고 미안하다면서 왜 졸업 안해?" "가기 싫으니까."
"그게 고맙다는 표시야?" "…."
피터현은 '풍운아'라는 닉네임처럼 서울·파리·뉴욕을 오가며
언론인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복형과 누나가 있는 민기도 현재까지 홍보대행회사, IT회사를 거쳤다.
"야, 욕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봐"라고 멍석을 펴놓는 아버지 앞에서
아들은 한없이 편한 표정이다. 불만이 있느냐고 묻는다.
"전화값 많이 나온다고 끊는데, 제발 그러지 좀 마세요. 그리고
엄마한테 잘 했으면 좋겠어요." "야 임마, 내가 그보다 어떻게 더 잘
해?" "어? 아빠가 효자 소리 듣는 건 할머니를 모신 엄마
덕분이에요." "…."